[글] 아티스트에디터 (아띠에터) 남예지 artietor@mhns.co.kr. "재즈 보컬리스트입니다. 육식은 하지 않고, 멋진 글을 쓰고 싶은 꿈이 있어요"

[문화뉴스 남예지 아띠에터] 18세기 파리의 어둡고 악취가 가득한 생선 좌판에서 한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는 출생과 동시에 어머니의 부재라는 비극의 상황을 맞이한다.

아이는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자라나며, 관계의 결핍은 곧 감정의 결핍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비정상성은 '無체취'의 존재로서 표현되고 있으며, 여기서 체취란 인간임을 나타낼 수 있는 상징계의 후각적 기호로써 작용하고 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주인공 그루누이가 인간으로서의 후각적 기호를 소유하기 위한 눈물겨운(?) 사투를 그리고 있다.

그는 인간의 체취를 가둔 향수를 만들기 위한 원료를 여성들로부터 얻는다. 동물의 기름을 여성의 시체에 발라 체취를 추출하는 방식으로 주변의 여성들을 하나씩 살해한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기는데, 왜 꼭 여성의 체취여야만 했을까?

 자크 라깡(jacques Lacan)은 인간의 정신세계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생의 초기에 절대적 존재로서의 어머니가 아이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시기를 상상계라고 하며, 언어의 습득을 통해 욕구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는 시기를 상징계라 한다.

 

여기서 실재적 욕구와 언어로 표현된 요구 사이에는 영원히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는 곧 어머니와의 유대를 깨뜨리는 원인이 되며, 동시에 아버지의 법이 지배하는 상징계로의 진입을 가능케 하는 사건이 된다. 프로이트에서 라깡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 이론에서는 아버지가 상징계의 엄격한 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반면 어머니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는 존재일 뿐인데,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에 역할을 부여한 학자가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였다.

크리스테바의 이론에서 어머니의 이미지는 abject(비체, 卑體)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아이에게 공포 혹은 혐오의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abject로서의 어머니는 단지 상상계에서만이 아니라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적 존재로서 침입과 이탈을 통해 상징계의 아이에게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한다.

참고로 크리스테바의 abject는 굉장히 모호한 개념으로, 침이나 혈액, 소변, 대변과 같은 것들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좀 더 빠를 수 있다. 이들은 몸의 경계 내부에 존재할 때는 내 존재의 일부로서 특별히 의식되지 않는 것들이나, 몸의 경계를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그때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이 되어 버린다.

 

 출생 직후 어머니를 잃고, 그 어머니를 대체할 수 있는 관계조차 전혀 없었던 그루누이는 정상적인 상징계로의 진입에 실패한 존재였다. 그루누이가 여성의 체취를 강렬하게 열망하는 이유는 아마도 abject로써의 어머니를 여성에 투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상징계의 질서 속에서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어야 할 abject가 상징계 진입에 실패한 그루누이에게는 동경의 대상으로 전복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여성의 체취를 만들어내는 땀이나 혈액 등의 온갖 분비물들, 즉 abject를 온전히 가두어 소유하는 것이 그루누이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는 자신을 정상의 존재로서 상징계의 성공적인 진입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여성의 체취라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루누이가 여성의 abject로 만든 향수를 뿌리자, 이전까지 자신을 멸시하던 주변 사람들이 갑자기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기 시작한다. 상징계의 진입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향수는 후각적 기호의 위장일 뿐, 진정으로 그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는 여전히 감정이 결여된 존재로 아무런 가책없이 여성들을 살해한다. 

 

결국 그루누이는 여성들을 죽인 댓가로 사형대에 오르게 된다. 사형대에 오른 그는  자신이 만든 향수를 손수건에 묻혀 그 향을 퍼뜨린다. 그 순간 사람들은 향에 취해 그의 죄를 부정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누군가는 그가 천사라고 소리친다. 상징계에서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어야 할 abject로 만든 향에 취해서 말이다!

어쩌면 인간에게는 abject가 거부해야할 대상이면서도 무의식중에 그것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abject로서의 모체로부터 태어난 존재이기도 하므로. 아무튼 향에 완전히 취하자 사람들은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마음껏 뒤엉켜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기 시작한다. 교황조차 그 향에 굴복함으로써 종교적인 질서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상징계의 강력한 법인 근친상간과 동성애에 대한 금기마저 무너진 채 혼돈의 세상을 맞이한다.

그루누이가 그렇게도 진입하기 원했던 상징계의 질서가 그로 인해 모두 전복된 것이다. 그제서야 그루누이는 자신이 원했던 것이 이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하지만 상징계의 질서를 파괴하고 아버지의 법을 무너뜨린 존재의 마지막은 죽음이라는 처벌이 따를 뿐이었다. 그는 스스로 온 몸에 향수를 쏟아 부음으로써 향에 미친 사람들에게 먹혀 사라진다. 

 살인마가 된 그루누이가 애초에 원했던 것은 단지 어머니였고, 그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승화시킬 한 명의 여성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린 그루누이에게는 이러한 이해를 도와줄 단 한명의 어른도 없었다. 누구도 부모의 대체자로서 그를 도와주려하지 않았고, 상징계의 비정상적 존재로 밀어내고 고립시켰다. 그렇게 불행한 살인마가 탄생한 것이다.

살인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그에게 왠지 모를 동정이 생기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상징계에서 ‘정상성’의 기준이 무엇이며, 그렇다면 그 안에서 '개별성'이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혼란 때문이다. 과연 그루누이가 살인마가 된 것은 온전히 그 자신만의 책임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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