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어주는 남자 #001 -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

   
 

[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대중영화에는 많은 '맨'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초인적인 힘을 가진 영웅으로 등장해 세상을 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 그들은 세상만 구하는 것이 아니죠. 이 영웅들은 영화산업을 구하며 자본의 수호자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겨울 국내에 도착한 영웅은 변종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죠. 오히려 기존의 영웅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때론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대신에 '버드맨'이 구하는 것은 영화였습니다. 그는 할리우드 산업으로부터 영화를 구하기 위해 도착한 메신저입니다.

현시대 영화에 대한 거침없는 쓴소리
비평가, 영화 산업 등을 시작으로 '버드맨'은 비판을 넘어 비난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해 모두 화살을 쐈습니다. 미국 영화예술 아카데미협회가 주목했던 부분도 자본에 잠식된 영화산업에 대한 반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몇몇 오래된 평론가들은 요즘 영화가 재미없다는 말을 하고는 합니다. 과거에 느꼈던 영화적 성취의 순간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이유와 함께. 영화 산업은 테크놀로지를 통한 스펙터클의 구현에 힘쓰고 있고, 제작사는 안정적 이야기, 전개를 기반으로 리스크를 최소화한 영화를 스크린에 걸고 있습니다. 혹은 더 빠른 편집, 더 현란한 액션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앞에 이야기한 모든 것들을 집약적으로 잘 보여주는 영화 제작사가 있습니다. '마블'은 '아이언 맨', '토르', '캡틴 아메리카' 등 해마다 히어로 영화로 주목을 받고 있죠. 3D와 함께 더 현란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마블의 이야기는 전개의 복잡성을 최소화하며 재미를 추구합니다. 영웅과 적대자의 만남 - 영웅의 패배 - 조력자를 통한 위기의 극복 - 적대자와의 재대결에서의 승리. 이 구조를 반복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히어로 물을 제조하는 장인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블은 그들의 공식화된 장르 구조를 매번 흥미롭게 변주하면서 관객을 영화관으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마블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증가하고 있고, 흥행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이들의 영화를 취향의 문제로 말할 수는 있지만, 가치가 없는 영화라고 말하기 힘든 점은, 많은 관객이 선호한다는 점이죠. 수용자에게 인정을 받고 있기에 이 영화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은 하기 힘듭니다. 그런데도 이 거대한 세력을 당당히 마주 보고 있는 영화가 '버드맨'입니다. '버드맨'은 무지막지하게 현대 영화산업에 쓴소리를 던졌고, 오스카 시상식은 이에 대답했습니다. 미국 영화예술 아카데미협회가 이 영화에 과도한 관심을 보인 것은 예술적 성취에 무뎌진 현대 영화 산업에 대한 자가 반성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두 장면에 대한 개인적 잡담

'버드맨'은 굉장히 직설적인 영화이기에 표면적으로 이해가 어려운 영화는 분명 아닙니다. 그렇지만 쉬운 영화라고도 할 수 없죠. 누군가 각각의 캐릭터에게 접근해 그들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체한다면 캐릭터들의 욕망과 상처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공 리건(마이클 키튼)이 던지는 몇몇 대사는 호기심을 불러오기도 하죠. 더불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샘(엠마 스톤)이 보고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많은 의문 중에서 두 가지의 이미지가 말을 걸어 왔습니다. 원 테이크 기법으로 촬영된 영화를 절단하고 있는 컷. 이 글은 그 컷에 등장한 운석과 해파리가 제게 건넨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이미지 - 타오르는 운석의 하강
활활 타는 운석의 이미지. 하나의 상징처럼 보이는 이 이미지를 통해 '버드맨'이 관객에게 하고 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먼저 영화의 오프닝과 함께 등장한 운석부터 보겠습니다. 여기서 운석이 하강하고 있는 운동성에 집중한다면 리건의 심정, 혹은 위치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하강운동은 리건이 '버드맨'을 그만둔 이후 추락한 배우로서의 처지(인기의 상실, 절망)를 보여주는 듯하죠.

그리고 연극의 종장을 총소리로 장식한 뒤에 나오는 운석의 추락 이미지는 리건의 텅 빈 내면의 절규로 읽힙니다. 그는 이 연극을 통해 추구하려고 했던 예술적 이상이 영화산업과 비평가 앞에서 무기력한 것을 목격합니다. 리건이 기억되는 방법은 예술을 시도한 배우가 아니라 오로지 버드맨이라는 산업적 이미지였고, (관객이 그를 평가할 때엔 늘 버드맨이 기준이 됩니다. '버드맨이 연기도 잘하네'라는 찬사를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그가 추구하고 싶었던 예술적 성취는 시도하기도 전해 비평가에게 비난을 받습니다. 이때, 리건은 더 버틸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운석이 그의 미래로 보이죠.

리건이 '버드맨'이 되는 상상 속에서는 하늘을 나는 상승 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하강운동을 하는 운석과 대비가 됩니다. 버드맨/리건, 상승/하강이라는 대립 항을 통해 버드맨과 그의 관계 - 인기 있는 버드맨, 주목받지 못하는 배우 리건 -가 뚜렷이 드러나죠. 그리고 영화를 향한 대중의 선호 취향과 할리우드 산업의 현재 위치까지도 이 대립 항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운석이 활활 타고 있는 '불' 이미지에 집중한다면 다른 관점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등장한 운석의 불꽃은 나락으로 떨어진 리건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성취에 대한 열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리건은 이번 연극을 통해 재기하고 관객의 환호를 받고 싶었고, 배우로서의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싶어 했습니다. 그가 버드맨을 자신과 분리하려는 시도는 히어로 물 뒤에 숨지 않으려는 배우, 예술가의 의지로 이해될 수 있죠. 추락한 자의 절실함과 열망이 불꽃을 통해 표현되고 있었습니다.

같은 운석과 불의 이미지이지만 연극의 종료와 함께 등장하는 운석의 연소는 관객의 환호, 열광이라는 측면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리건의 삶, 그리고 리건이라는 배우는 이 연극을 통해 공허함과 자신의 한계를 느꼈고,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에 이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이 순간 관객들은 매우 열렬히 환호하고 있죠. 이 환호는 리건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열광인가, 혹은 예술과는 무관한 버드맨의 복귀에 대한 열광인가. 그 답까지는 내릴 수 없지만, 아무튼 관객은 환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끝으로 이 운석을 더 거대한 상징으로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이 운석을 영화로 이해한다면 어떤 의미를 말할 수 있을까요. 영화는 탄생부터 뜨겁게 타오르며 예술이라는 영역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할리우드를 기반으로 한 자본에 의해 더 미친 듯이 연소하고 있죠. 하지만 영화는 추락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영화는 과거의 창의성과 독창성 실험성을 잃고, 동어반복의 이야기를 재생산하고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를 본 감독의 거대한 절망이 타오르는 운석의 추락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두 번째 이미지 - 어쨌든 리건을 살려준 해파리
영화의 시작과 함께 아주 짧은 시간 해파리가 보입니다. 후반부에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 존재를 잘 모르고 넘어갈 정도로 아주 잠깐 등장하죠. 고백하자면 이 해파리가 거기 왜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리적인 해독을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읽는 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우선, 확실한 것을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해파리는 자살을 원해 바다로 걸어간 리건을 다시 바다 밖으로 향하게 했던 존재입니다. 즉, 죽음을 원했던 남자에게 삶을 찾아준 존재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물을 죽음과 삶, 재생, 부활 등의 의미로 읽는 것은 대중적 해독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크게 독특한 부분이 아니죠. 고전 문학 속의 '공무도하가', 서양의 '노아의 방주' 등에서 물은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환생을 가능케 한 해파리의 존재입니다. 역설적이게도 현실이 괴로워 죽으려 했던 남자는 살에 부딪힌 물리적 고통 때문에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여기까지가 표면적으로 이해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해파리(혹은 고통)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버드맨'이 영화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였다면 결국, 해파리도 영화라는 예술, 산업과 함께 생각해야 (적어도 나만의) 답이 나올 것 같았죠. 리건이 예술을 추구하고 싶었던 존재, 영화로서 예술을 추구하려던 인물이라면 해파리는 그(영화)에게 쓴소리를 해주는 존재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추락하는 영화를 본 궤도에 돌려놓으려 하는 존재는 아니었을까요.

   
 

'버드맨'은 영화산업의 현재를 비판과 풍자를 통해 보여줬습니다. 현재 시대의 추세라면 영화는 자본에 자리를 내어주고 최초에 추구했던 창의성과 예술적 가치로서의 가능성은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영화를 산업에 뺏기지 않기 위해서는 영화가 정신을 차릴 수 있게 쓴 소리(해파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지금의 변질한 영화에 고통을 줘야 하고, 다시 물(죽음) 밖으로 나올 수 있게 이끌어 줄 수 있게 말이죠.

리건이 절망감 앞에 총을 쏜 장면 이후, 해파리가 더 선명히 보이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분명히 보이는 것은 해파리가 죽어있다는 것입니다. 생물의 죽음이라는 사실 자체보다 더 괴괴함을 풍기는 부분은, 리건을 물 밖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죽었다는 것이죠. 더 확장하자면 영화에 쓴소리를 던질 대상이 소멸하였다는 것입니다. 해파리의 죽음에서 쓴소리를 해줄 수 있는 존재마저도 부재한 영화산업의 현재를 생각했습니다. 축 처진 해파리의 이미지는 영화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영화적 디스토피아까지 상상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파리를 읽어도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영화 산업에 쓴소리를 던져줄 해파리는 누구일까요. 창의적인 감독, 영화에 대해 고민을 하는 제작사, 좋은 비평가 등 언급될 수 있는 대상은 참 많죠. 하지만 영화를 더 부지런히 읽고, 더 창의적인 작품을 갈망하는 관객의 존재가 가장 따가운 해파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미국 영화예술 아카데미의 고백
201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독특한 형식으로 시간을 재구성한 두 편의 영화가 주목받았습니다. 한 편은 '버드맨'으로 원테이크 촬영을 통해 시간의 동시성을 놓지 않으려는 집착을 보인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편, '보이후드'가 있었죠. 이 영화는 12년 동안 촬영을 하면서, 시간이 인간에게 주는 영향을 압축해 담았습니다. 시간 앞에서 실제로 변해가는 인간의 진짜 살결, 그 물질성을 담으려 했다는 시도 자체가 놀라웠으며, 영화가 시간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보이후드'는 영화사적으로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작품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네요.

그런데 올해 오스카 시상식은 '버드맨'에 더 주목했습니다. '버드맨'은 4개 부분을 싹쓸이 수상(작품, 감독, 각본, 촬영 부분) 하는 괴력을 보였죠. 하지만 이 영화의 형식 자체가 최초의 시도가 아니었다는 점, (히치콕 감독은 '로프'에서 원테이크 트릭을 먼저 보여줬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도구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에서 '보이후드'의 영화적 성취에 비교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번 시상식은 '영화' 그 자체를 위해 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듯한 '버드맨'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은 '미국 영화예술 아카데미협회'의 할리우드에 대한 진단이자 반성일 것입니다. '버드맨'이 영화 산업에 쓴소리를 날리는 해파리가 되었죠. 이 해파리로 인해 영화산업이 창의성과 실험성을 찾고, 자본에 패하지 않기 위한 움직임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버드맨'은 영화를 구한 히어로 영화로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영화의 디스토피아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영화가 다시 그 가능성을 찾고, 새처럼 날기를 바랍니다.

 
[글] 아띠에터 강해인 starskylight@mhns.co.kr 영화를 보고, 읽고, 해독하며 글을 씁니다. 좋은 영화는 많은 독자를 가진 영화라 믿고, 오늘도 영화를 읽습니다. 영화리뷰 웹진 '무빗무빗'의 에디터. (movitmovi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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