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MHN 장기영 기자] 올해 주목받거나 화제를 일으켰던 연극 작품들에 계속해서 이름을 올리는 배우가 있다.

배우 안병식이다. 관객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낳았던 문제작 '국부',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많은 이들이 재연 소식을 기다렸던 '목란언니'에 이어,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 성기웅의 신작 '20세기 건담기'까지. 

그는 다음 달 개막 예정작인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까지 합하면, 올 한 해에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무대에 세 번이나 오른다. 연극배우로서 2017년을 아주 바쁘게 보내고 있는 안병식을 지난 달 27일 두산아트센터에서 만났다.

현재 연극 '20세기 건담기'에서 1930년대 대표 문인 이상을 연기하고 있는 그는, 사실 전도유망한 법학도였다. 어느 누가 감히 '연극하기'가 쉽다 말할 수 있을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연극계에서 그는 어떻게 연극을 시작하며, 10년 이상을 연극배우로서 버틸 수 있었을까? 또한 천재 작가라 불리는 '이상'을 어떻게 안병식만의 캐릭터로 소화해내고 있을까? 다음은 안 배우와의 일문일답이다.

 

▲ 현재 공연 중인 연극 '20세기 건담기'

작품 및 역할 소개 부탁한다

└ '20세기 건담기(이하 건담기)'라는 작품에서 건담가 '이상' 역을 맡았다. '건담기'는 이상과 박태원, 김유정과 구본웅 등 1930년대를 자기 작품의 자양분으로 삼았던 당대의 예술가들이 가까운 미래의 청중들을 상상하면서 '건담'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이야기를 라디오 발신한다는 컨셉의 '말'쇼이다. 참고로 건담이라는 말은 극작이자 연출을 맡은 성기웅 씨가 이상, 구보(박태원) 등이 자신들을 '말을 지어 올리는 사람'이라는 뜻의 건담가로 소개하곤 했다는 점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 어떻게 출연하게 됐는지, 출연 결심한 이유가 있다면?

└ 올해 초, 광화문의 '광장극장 블랙텐트'에서 '노란봉투' 공연을 준비하던 중에 캐스팅 제안을 받았다. 성기웅 연출님의 전작들을 보았는데 일반적인 드라마 구조를 따라가지 않으면서도 당대의 정조를 만들어내고 말맛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세계를 느꼈다. 한 번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비화라고 하기까지는 그렇지만, 제안을 받기 전 두산아트센터의 피디가 키와 몸무게를 물은 적이 있었다. 왜 그런 걸 묻나 했더니 연출님이 내 키와 몸무게가 이상과 비슷한지 확인코자 그랬다고 하더라. 고증이 철저하신 분이다. 다만 내 얼굴과 사진 속 이상 얼굴과는 그다지 비슷하지는 않다(웃음).

성 연출이 보기에 '이상'과 '안병식'은 무엇이 닮았던 걸까?

└ 이상의 키는 6척이 조금 안 됐다고 알고 있다. 180cm가 조금 안 되더라. 또한 마른 몸이었다고 한다. 캐스팅 이유를 물어보는 배우는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키와 몸무게가 연출님에겐 중요한 지점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명행 형(이명행)한테도 키와 몸무게를 물었다고 한다. 

본인이 생각하는 그림에 맞춰서 캐스팅하신 것 같다. 나는 이상처럼 생기지 않았다. 성 연출이 생각하는 이상의 상(像)에 내가 맞은 것 같다. 물론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과 성기웅이 생각하는 이상이 다를 수도 있다. 

나 또한 기존의 캐릭터를 그대로 재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안병식이라는 사람과 어느 캐릭터가 만나면서 새로운 지점,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될 수 있다. 이상은 알아갈수록 그가 천재라기보다는 미성숙한 근대청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내게는 매력적이고 아프게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이상의 소설보다는 수필 같은 글들이 더 좋았다. 수필에 보면 그런 면모가 드러난다. 이상은 날고 싶었는데 날지 못한 콤플렉스가 내면에 있었는데 아닌 척 가면을 쓰는 근대 청년 같았다. 

 
옛 서울말을 재현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성기웅과 협업하게 됐다. '언어'에 대해서 예민하고 날카로운 아티스트인데,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 우리말이 장단(長短)의 언어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관객들도 대부분 장·단음을 구별해서 듣지 못한다. 오히려 요즘의 관객들은 더늠(애드리브)이나 말의 뉘앙스를 즐기는 것 같다. 그런데 성 연출님은 말의 장단과 부사어의 활용, 지시어의 강조 등을 중시한다. 우리말의 원칙에 충실한 셈이다. 요즘에는 좀처럼 하지 않는 화술을 연마해야 하는 셈이라 초반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기분이 들기도 해서 다소 답답해도 충분히 즐길 수도 있겠다 싶다.

 

옛 서울말 대사를 준비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 듣기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일제 강점기나 해방 직후의 옛 영화나 쇼 프로그램 또는 만담 녹음본 등의 희귀본들을 구해서 반복해 듣곤 했다. 조선어독본이라는 일제 시대 조선어 교과서의 녹음본도 듣게 되었는데 조선어라는 이름으로 당대 어린이들이 선생님의 말을 따라 하는 구성이었다. 선생님의 말을 병아리처럼 따라 하는 80년 전의 어린이나 지금의 어린이나 해맑기가 다르지 않지만 같은 말이라도 '국어'가 아니라 '조선어'라는 이름으로 배웠어야 했다는 점이 안쓰럽다고 해야 할까, 묘한 기분이 들었다.


 

▲ 지난 3, 4월 두산아트센터 Space111서 공연된 연극 '목란언니'

 
실존했던 '작가'를 캐릭터로 구축하기는 혼란스럽지 않을까 한다. 작가가 남긴 창작물도 참고해야 하고, 작가에 대한 역사적 사실도 참고하다 보면 오히려 갈피를 잡기 힘들지 않을까? 어떻게 '이상'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 실존 인물 특히 작가를 캐릭터로 구축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당대의 자료가 남아있는 경우에는 어느 정도 캐릭터 구축에 반영을 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 쉽지 않은 결정이고, 유명 인물일수록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편차가 미묘하게 다르다. 

이를테면 이상의 처였던 변동림은 이상이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다 일경의 검문에 걸리곤 했다고 그를 기억하지만 그의 다른 친우들은 이상에게 그런 민족주의적인 면모가 있지는 않았다고 기억한다.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하기에 앞서 그에 관한 여러 자료나 작품들을 읽어 보고 내 나름대로 어떠한 이상을 만들어낼 것인지 결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결정에는 이상에 대한 연출 성기웅의 생각과 배우 안병식의 생각이 잘 접합하는 것도 중요하다.

 
본인이 이전부터 소설 혹은 시를 통해 만난 '이상'과 성기웅의 연극을 통해 새로 만나 '이상'은 많이 다른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지?

└ 그동안의 이상은 천재로서의 번뜩이는 면모가 강조되거나 그의 난해한 작품 세계를 풀어서 무대화하는 방식으로 표현됐다면, 성기웅과 안병식의 이상은 그보다는 비교적 위악적이고 때론 말장난도 즐겨하는 유쾌한 이상이 될 듯싶다. 당시 친우들도 이상에 대해 그의 작품 세계와는 다른 유쾌한 면모와 장난을 즐겨 쳤던 이로 기억한다. 물론 이런 모습들이 날고 싶지만 날 수 없었던 근대 식민지 청년의 가면일 수도 있다. 균형을 잘 잡는 게 중요하다.

 

관객들이 만날 '이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상의 작품 중 추천할 만한 것이 있다면?  

└ '날개'나 '오감도' 등의 작품 외에 '봉별기', '종생기', '실화' 등에서 작가님이 모티프를 얻으신 게 있는 것 같다. 각각 금홍, 변동림, 김유정과 관련 있는 이상의 자전적 소설인데 특히 '종생기'는 죽기 한 달 전 동경에서 쓴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산촌여정', '조춘점묘', '권태', '동경' 같은 그의 짧은 수필이랄까, 산문들을 좋아한다. 그가 잘 보인다.
 

 

▲ 현재 공연 중인 연극 '20세기 건담기'

'20세기 건담기'는 '깃븐우리절믄날',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 사람들', '소설가 구보씨의 1일'에 이은 연작 연극이다. 이전 작품들을 많이 참고하거나 신경 쓰이지는 않았는지?

└ 그중 두 작품을 봤다.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 사람들'은 당시 경성의 이런저런 사람들, 예컨대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 경성을 보고 놀란다든가 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소설가 구보씨의 1일'은 소설을 그대로 무대화하는 양식적 실험을 입체적 영상과 함께 보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오로지 말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전하는 쇼이다. 기존 작품과 다르기 때문에 참고는 해도 신경이 쓰이지는 않는다.

 

연극은 만담과 모놀로그, 라디오 드라마, 변사쇼, 그리고 일본의 전통 예능 라쿠고 등 다양한 '말하기' 방식이 나온다고 알고 있다. 이 다양한 '말하기' 방식들의 각 매력과 특징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살려 관객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 이 질문에 대해서는 간단히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방식은 그저 거드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말을 잘 전달하는 것 같다. 그게 잘 되면 오히려 반대로 관객은 말하는 방식이 다채롭다고 느낄 것이다. 말 전달의 여러 양식은 그저 다른 모양과 색깔의 방석 같다, 말하는 사람이 앉는.

 

극작가 겸 연출가인 성기웅과의 호흡은 어땠나?

└ 작·연출을 같이하는 연출가와 작업할 경우 머릿속에 분명한 상(像)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성기웅 연출과의 작업도 그것을 충실히 수행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여러 면에서 '배우에게 열려 있는 연출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배우로서는 고마운 타입의 작·연출가이다.

[문화 人] 전도유망한 법학도, 연극배우가 되다…배우 안병식 인터뷰 ②로 이어집니다.
 
key000@mhns.co.kr 사진ⓒ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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