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아빈(婀贇) kim.abin.beautiful@mhns.co.kr 시인 겸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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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색깔은 무슨 색일까?

첫째, 하얗다. 둘째, 무색. 셋째, 多색. 20세기 노르망디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라울 뒤피는 "정점에 이른 태양, 그것은 검은색이다. 사람들은 눈이 부셔 더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라며 빛을 검은색으로 표현했다.

사실 빛이 어떤 색으로 보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같은 존재가 사람마다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것이 빛에 대한 견해일 것이다. 인상주의는 이러한 빛을 탐구한 소중한 미술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시작은 과연 어땠을까? 그들의 태동에는 노르망디라는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과 사회가 있었다. 그들의 사고와 눈과 감동을 소소히 따라가는 전시가 될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터너의 안개, 그리고 거기서 희미하게 비치는 르누아르. 아른한 인상이 퍼져있지만, 그 안에 단연 집약된 꼭 필요한 인상이 군데군데 내 마음을 감동으로 고동쳤다. '터너 이전엔 영국에 안개는 없었다'는 말이 전해지듯,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도 그 솜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희미한 시간 속에서도 꼭 필요한 감동을 주는 일들이 기억에 남아 오래 지속하 듯, 터너는 그림으로 우리의 인생을 빗대는 것 같았다. '그림은 무언의 시'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터너였다.

부댕과 모네는 빛의 다른 면에 집중했다.

"내가 진정으로 화가가 되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부댕의 덕분이다." 라는 모네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빛으로 세상이 달라지는 면면을 주의 깊게 관찰했고, 화폭에 담았다. 하지만 부댕은 보다 빛으로 생기는 어둠또한 염두에 둔 듯하다. 해가 빛나는 드넓은 초원 위의 소들은 고동색과 검은색의 생동감 있는 필체로 나타내어 운동감이 있다. 해지는 노을 아래 검게 선으로 표현된 선박들은 상대적인 쓸쓸함과 저물어 가는 것들을 생각나게 한다. 반면에 모네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빛으로 사물을 나타냈다. 우리는 모네를 통해, 부서지는 빛들로 이루어진 에트르타를 볼 수 있다. 바다와 커다란 바위가 빛을 받아 여러 깔로 아른거리며 황홀해질 수 있다는 것은 빛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다.

   
 

라울 뒤피의 그림은 청량감과 위트가 돋보인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사물들의 표면적인 이미지가 아닌 그 사물의 실재 힘을 담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라는 사실을 여실히 그의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의 대표작 '빨간조각의 아틀리에'를 보면 밝고 스케치가 엿보이는 게 수채화 같다. 사물의 에너지가 그의 맑은 기운을 통해 드러난다. '검은 화물선' 연작을 통해 검은 면으로서 잔혹성과 빛의 정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 바탕에 어부들의 손놀림을 스케치로 남겨 힘든 상황에서도 일상을 유지하는 마을의 평온함이 위트있게 다가온다.

그림은 굳이 대가들의 것이 아니라 해도, 그 사람의 감정과 상황, 혹은 사물이나 장소의 에너지가 느껴진다는 것 자체로도 좋은 그림을 만날 수 있다. 뒤부르의 '선원들'을 보면 바다와 한바탕하고 온 후 선원들의 지침과 남모를 고뇌가 절절히 다가온다. 부두 난간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그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위험한 바다와 싸우는 용기를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들의 땀을 닦아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은 연민이 샘솟았다. 하지만 선원이라는 직업으로 만들어진 특유의 에너지로 범접할 수 없어, 멀리 미술관 그림 밖에서 그들의 고민이 해결되기만을 바랐다. 장 트루쇼가 그린 '그라빌 성당 종탑 계단'은 햇빛을 받아 한층 더 성스러운 성당의 분위기가 돋보인다. 벽을 타고 올라가는 종탑 계단에 오르면 천국과 더 가까워지는 듯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에너지가 넘실댄다. 이 그림을 보고 그라빌 성당의 신자들이 늘어나지 않았을까.

이번 전시에서 내가 남긴 유일한 기념품은 로베르 팽숑의 '앙프레빌 라 미 부아 맞은편 산책로' 그림이 박힌 책갈피다. 부인과 손을 맞잡은 아이가 노을 진 늦여름 산책로를 거니는 모습이 참 평화롭고 어렸을 적 향수에 젖게 한다. '나도 저렇게 근심 없이 자연 풍경을 즐기던 때가 있었구나',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에 옛 내가 투영된다. 그림으로 말미암아 행복했던 인상을 지금의 것으로 가지고 싶은 바람이랄까. 그때의 기억과 에너지를 상기시키는 노르망디 인상주의는 그래서 뜻깊고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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