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하녀들' 리뷰

   
 


[문화뉴스]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연극을 글로 담아내기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잘 다듬어진 전개로 일목요연하게 담아낼 수 없는 그들의 연극성은, 그들이 왜 '연극'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견고한 근간이 된다.

모든 예술에는 다양한 해석과 끊임없는 생각들이 뒤따라야 한다. 간결하고 완벽하게 끝맺는 생각, 일말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해석의 완성판이 존재하는 예술에는 우리의 사유의 가능성을 확인할 기회를 찾을 수 없다. 시공간을 초월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작품일 수록, 위대한 '원작'으로서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 늘 훌륭한 고전으로 자신들의 독특한 사유를 드러내는 극단 성북동비둘기는, 자신만의 연극성을 통해 '원작'을 돋보이게 하며 '연극'을 빛나게 한다. 녹록치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연극을 반드시 다시금 생각해봐야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원작을 되돌아보고, 연극을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연극실험실 일상지하(이하 일상지하)'가 곧 문을 닫는다. 그들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공연으로 택한 작품은 바로 장 주네의 '하녀들'이다. 그들의 공간 '일상지하'로 내려가자, 두 여배우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무엇으로든지 관객이 (객석에) 앉자마자 1, 2분 내에 소통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던 김현탁 연출의 말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그들이 내뿜는 공포와 혼란의 감정은 더 이상 그들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어두운 지하 창고에 비슷한 극장, 단 두 개의 조명, 접이식 철제의자, 츄리닝 차림의 두 여배우. 그리고 그들의 미세하고도 강렬했던 전율. 이 모든 시각, 청각, 촉각적 효과는 금세 을씨년스러운 두 여배우의 세계를 곧 우리의 것으로 체화시켰다.

연극의 원작인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은 프랑스의 빠뺑자매 사건을 모티브로 쓰였다. 프랑스에 큰 충격을 안겨다 준 이 사건은, 약 7년 간 하인으로 일하던 빠뺑자매가 주인을 살해하고 그 집에서 동성애를 즐기다 발각됐던 사건이다. 극에서 마담의 하녀로 일하는 끌레르와 쏠랑쥬라는 자매는, 마담이 외출하면 어김없이 연극놀이를 즐긴다. 동생 끌레르는 마담 역을, 언니 쏠랑쥬는 끌레르 역을 맡는 것이다. 이들의 연극에서는 마담의 잔인함과 악독함에 의해 비굴하고 비참하기 짝이 없는 끌레르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실제 관객에게 나타나는 마담의 모습은 히스테릭한 모습은 있을지언정, 그녀들이 그리는 잔혹함은 쉽사리 찾아보기 힘들다.

 

   
 

연극은 모방과 재현에 집중돼있다. 빠뺑자매 사건이라는 대상을 모방하는 데에서 시작된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 희곡을 재현하는 성북동비둘기의 연극 '하녀들'. 그리고 연극놀이라는 모방과 재현의 세계를 즐기는 끌레르와 쏠랑쥬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Poetica)'에서, 예술 활동 전반이 인간의 모방본능에 뿌리박고 있다고 얘기한 바 있다. 모방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본능이며, 그 대상은 인간과 자연의 보편적인 양상 또는 법칙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끌레르와 쏠랑쥬는 그 점에 있어 인간의 모방적 본능에 충실한 인간들이었다. 그들이 즐겼던 연극놀이는 마담과 하녀 끌레르의 상황을 모방하고 재현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방이 반드시 사실과 절대적인 진리만을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모방이란, 반드시 주체의 시선이라는 여과기를 거치기 때문에, 모방의 구현은 어떤 대상을 주체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끌레르와 쏠랑쥬의 과장된 모방의 세계는 사실 그들의 간절한 소망의 타당성을 제시한다. 끌레르와 쏠랑쥬의 연극처럼 잔혹하고 악랄한 주인은 실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직적인 구조 속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던 그녀들은 연극을 통해 마담을 폭력적으로 그림으로써, 현재의 세계를 전복하기 위한 강렬한 동기가 부여되곤 하는 것이다.

 

   
 

실제로 연극에도 모방과 현실의 세계가 적절히 범벅되어 있다. 수십 개의 철제 의자는 실제로 그녀들이 앉는 의자가 되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의 징검다리가 되기도 하고, 마담의 상상 속 장례식 꽃이 되기도 한다. 마이크는 연극놀이에서 끌레르 역을 맡은 쏠랑쥬를 괴롭히기 위한 소음의 물건이 되기도 하고, 그녀를 삼키려는 남근(Phallus)이 되기도 한다. 재밌는 것은 하녀들의 괴로운 모방세계 속에서 괴로워지고 있는 이 시공간이, 시니컬하고 히스테릭한 마담에 의한 유머 코드를 담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일례로, 이 연극의 무대이자 관객들의 객석이기도 한 '일상지하'는 마담의 조롱에 의해 지하 극장이 아닌, 그저 지하실 즈음으로 격하된다. 이 장면에서는 웃음을 참기 힘들어진다. 마담의 존재는 두려움과 긴장으로 물들여진 관객들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간혹 보이는 하녀 자매의 살기 또한 연극놀이 즈음으로 받아들이는 마담에 의해 관객들은 관조의 시선에서만 느낄 수 있는 웃음을 머금는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바로 마지막 끌레르의 죽음 부분이다. 끌레르는 마담을 죽이지 못한 비겁자가 되어 쏠랑쥬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 쏠랑쥬는 끌레르에게 총을 쏴 죽인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망치. 망치의 머리는 총의 개머리판이 되며, 쏠랑쥬는 객석으로 기어들어간 끌레르의 방향과는 반대에 총을 겨누고 쏜다. 망치의 손잡이에서 나온 연기와 포성. 그리고 끌레르의 죽음은 더욱 흥미롭다. 객석에 쓰러진 끌레르는 일어나 스탠딩 마이크에 입을 대며 노래를 부르며 쏠랑쥬에게 "커피를 부으라"고 명한다. 그러자 쏠랑쥬는 끌레르 머리에 커피를 '붓고', 그 커피는 끌레르의 혈흔이 되고 만다. 김현탁 연출의 이미지 연출의 감각이 돋보였다. 어느 것 하나 사실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인 묘사보다 더 강렬하게 뇌리에 박히는 장면을 만들어낸 것이다.

 

   
 

단 세 명의 배우, 어엿한 극장이 아닌 평범한 지하 연습실, 단출한 객석, 소박한 오브제. 이것만으로도 연극의 본질을 나타낼 수 있는 극단 성북동비둘기와 김현탁 연출가야말로 진정한 연극인들이 아닐까 한다. 많다고, 크다고, 화려하다고, 잘 다듬어졌다고 '잘 만든' 연극이 될 수는 없다. 연극은 연극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으니 연극인 것이다. 이들의 '하녀들'은 시놉시스만으로는 작품 전반을 담아낼 수가 없다. 서사 이외에도 이 연극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더 다양하기 때문이다. 행동 없는 서사의 매끄러운 전개만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동(action)과 반응(reaction)에 기반한 드라마(drama)를 그리는 성북동비둘기의 연극이, 다른 어떤 장르도 아닌 '연극'만이 할 수 있는 본질적 특성을 가장 잘 포함하고 있었다. 이 글을 통해 이 작품을 파악하려는 모든 독자에게 감히 전한다. 이들의 연극은 직접 '보아야' 알 수 있다고 말이다.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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