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일: 2024.03.19
캐스팅: 이봄소리, 전성민, 송영미
장소: 링크아트센터 드림 1관
좌석: J열 중앙

'여성의 문학'이라는 것이 금기시되던 시대가 있었다.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작가의 영역은 오직 남성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여성의 이름을 단 책은 출판사 문턱을 통과하기도 힘들었다. 여성이 글을 쓰는 것만으로 세간의 조롱과 비웃음에 휩싸여야 했던 18세기의 영국, 그 금단의 땅에 기꺼이 발을 디딘 세 자매가 있었다. 샬럿, 에밀리, 그리고 앤 브론테. furor scribendi, 글쓰기에 미친 여인들의 열망 가득한 이야기가 황량한 요크셔 벌판 한가운데서 펼쳐진다.

가난한 환경과 갑갑한 현실 속에 살던 브론테 자매들의 유일한 행복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함께 글을 쓰며 수많은 이야기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들어내던 자매들은 서로에게 소중한 작가이자 독자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작가의 꿈에 가까워지던 자매들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자매들의 삶과 죽음을 모두 지켜보았다는 미래의 누군가가 보낸 편지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가득한데... 편지를 보낸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샬럿, 에밀리, 앤 브론테, 이 세 작가의 인생을 담은 소설은 어떤 페이지로 끝을 맺게 될까?

'제인 에어'의 샬럿 브론테, '폭풍의 언덕'의 에밀리 브론테, '아그네스 그레이'의 앤 브론테. 지금의 우리에게는 시대의 명작을 남긴 작가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이름들이지만 이들이 살던 시대에서는 책 표지에 그들 자신의 본명을 적어넣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이유는 간단했으니, 브론테 자매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에 부딪혔음에도 이들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자매는 펜을 들었고,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렇게 완성된 이야기들은 시대와 차별의 장벽을 뛰어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까지 닿았다. 무대에 짙게 서린 브론테 자매의 열정을 보며 다짐하게 된다. 우리가 넘기는 이 페이지들에 새겨진 이들의 땀방울을, 그 치열한 사투의 역사를 기억하겠노라고.

독자가 없이는 작가도 없다 하듯 글은 누군가에게 읽힐 때 진정한 가치를 발휘한다. 시대의 외면 속에 숨어서 글을 쓰던 자매는 서로의 작가이고 독자였으며 때론 평론가였고, 열렬한 팬이었다. 기대고 의지할 곳이라곤 서로뿐이었지만 서로면 충분했던 자매의 모습에 마음 깊숙이 온기가 전해져왔다. 그들은 날을 세워 던진 차가운 말 안에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고이 숨겨놓았다. 매 순간 진심 어린 애정과 걱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이 다정하고 따뜻한 자매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브론테', 세상의 모든 브론테들에게 이 이야기가 닿기를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브론테', 세상의 모든 브론테들에게 이 이야기가 닿기를

 

'브론테'라는 이름이 눈보라 속에서도 꽃을 피워낸 것은 세 자매가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지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작품 전체를 감싸고 있는 연대의 메시지는 함께 차별을 극복하고 함께 힘든 시간을 견뎌냈으며, 결국 함께 이야기를 완성해 낸 브론테 자매의 뜻깊은 발자취를 더 넓은 세상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뮤지컬 '브론테'는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 세상 모든 사람에게 말한다. 함께 손을 잡고 뛰어오르면 아무리 가파르고 높은 벽이라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이다.

글은 세 자매가 세상을 읽고, 받아들이고, 읊는 언어 그 자체와도 같았다. 자매는 글을 통해 숨을 쉬며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브론테의 글은 이들의 인생, 그 자체를 고스란히 담고 태어난 또 다른 브론테이다. 글이 되어, 책이 되어, 음악이 되어 새겨진 브론테들의 짧았던 생이 전하는 먹먹한 감동의 무게는 아주 오래도록 세상에 남아 기억될 것이다.

성공적인 초연을 마친 후 돌아온 뮤지컬 ‘브론테‘의 재연에는 생각보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완성도를 더한 무대의 디테일이 눈에 띄었다. 간단하고 직관적이었던 초연의 무대 구성과는 다르게 찢겨진 페이지를 형상화한 듯한 구조물이 더해진 것을 비롯하여 보다 치밀해진 공간 활용이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더해 다양한 소품과 그림자를 이용한 연출 등이 더해져 브론테 자매의 글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구석구석 세심하게 채워 넣은 무대 요소들이 전체적인 몰입도를 높이는 데에 큰 몫을 했다.

넘버와 스토리의 진행은 전반적으로 빨라진 느낌이었다. 몰아치는 템포 속에 더 박진감 있는 작품으로 변모한 듯했으며, 속도감을 살린 구성으로 지루하지 않게 관람할 수 있었다. 다만, 초연 당시에는 깊고 세밀한 묘사가 이루어졌던 장면들이 변한 구조에 맞추느라 충분한 감정적 여유를 가질 시간 없이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으나, 이런 변화를 반길 관객들도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브론테', 세상의 모든 브론테들에게 이 이야기가 닿기를

 

다시 한번 ‘브론테‘로 돌아온 이봄소리, 송영미 배우와 새롭게 합류한 전성민 배우 모두 브론테 자매가 환생한 듯한 놀라운 일치감으로 극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새롭게 추가된 넘버도 깊은 감성으로 소화해 내며 브론테의 삶을 섬세하게 표현함과 동시에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눈길을 끌었다. 특히 배우들 간의 합이 정말 자매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다정하고 끈끈하여 보는 내내 미소가 가시지 않을 정도였다. 브론테의 이름으로 뭉친 모든 배우의 무대가 궁금해지게 만드는 인상적인 연기였다.

뮤지컬 ‘브론테‘는 글로써 존재한 세 자매의 인생을 그린 작품인 동시에 글로써 남은 세 자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오늘을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뜻깊은 작품이다. 끊임없이 부딪히고 깨어지는 고통을 겪으며 결국 세상에 자신을 남긴 이들의 뜨거운 발자국은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그 온기를 간직한 채 남아있다.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 좌절을 뛰어넘는 순수한 열망을 간직한 삶 끝에서 우리의 인생도 한 편의 글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한편, 뮤지컬 브론테는 오는 6월 2일까지 링크아트센터 드림 드림1관에서 공연된다.

문화뉴스 / 강시언 kssun08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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