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록' 시리즈 2탄 - 로큰롤 역사에서 빠질수 없는 인물들.

 
[글] 문화뉴스 아티스트에디터 김수영 panictoy27@mhns.co.kr 음악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어디까지일까, 실용음악과 건반을 가르치면서 음악방송 '음악잡수다' DJ를 맡고 있다

[문화뉴스] 1955년에 빌 헤일리(Bill Haley)의 'Rock Around The Clock'을 시작으로 성장한 로큰롤 뮤직.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에게 엄청난 폭발적 에너지를 선사하며 또 다른 로큰롤 뮤직스타들을 만들어낸다.

대부분 '로큰롤' 하면 흔히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은 바로 미국의 로큰롤 음악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엘비스와 함께 동시대를 살았던 흑인 가수 척 베리(Chuck Berry), 그리고 빌 헤일리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공연에서 오프닝 공연을 하며 인기를 끌었던 버디 홀리(Buddy Holly)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처음부터 스타는 아니었다. 트럭운전과 극장 안내원으로 일하며 자신이 직접 노래한 음악을 녹음하여 어머니의 생일선물로 드리고자 했던 청년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 이벤트를 위하여 'That's all right, mama'(1954)라는 곡을 녹음하게 되는데, 그 당시 '선 레코드' 사의 사장이었던 샘 필립스(Sam Phillips)는 이 곡을 듣고 난 후 엘비스와 계약을 하게 되고 앨비스는 선 레코드사에서 음반을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생각보다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에 샘 필립스는 곧바로 'RCA' 레코드사-선 레코드는 RCA에서 만든 또다른 레코드사였다-에 3만 5천불을 받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넘겼고, RCA로 이적한 엘비스가 1956년 1월 27일에 발표한 'Heartbreak hotel'이라는 싱글 곡이 발매 3개월 만에 차트 1위를 차지하며 이 곡은 무려 8주 동안 1위를 석권,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Heartbreak hotel'을 시작으로 'Don't be cruel', 'Hound dog', 'Love me tender'등의 노래들을 줄줄이 히트시키던 엘비스 프레슬리는 1958년 3월에 군입대를 하게 된다. 나라에 충성하는 애국자의 모습으로 훌륭하게 이미지메이킹에 성공한 그는 전역 후에도 여전히 큰 사랑을 받았으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후기 음악들은 그가 신인 시절에 보여준 정열적이고 패기 넘쳤던 로큰롤 가수로서의 음악보다는 듣기 편안한 팝 음악의 비중이 더 커지게 되었다.

가수로서, 또 영화배우로서 맹활약했던 그는 각종 약물 남용, 중독으로 1977년 8월 16일, 결국 약물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198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에 헌액되었다.

▶  백인들이 사랑했던 흑인 로큰롤 가수, 척 베리(Chuck Berry)

미용사 출신이라는 이색적인 경력을 가지고 있는 흑인 가수 척 베리는 1955년, 'Maybellene'이라는 곡을 발표하며 마치 오리걸음을 연상케 하는-덕 테일 스텝(Duck tail step)-특유의 무대 매너로 많은 인기를 얻게 된다.

심각한 인종차별로 인해 흑인 가수가 쉽게 성공을 거두기 힘들었을 시절, 라디오 디스크자키였던
앨런 프리드가 척 베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Maybellene'을 방송에서 많이 틀어주었는데, 사실 여기에는 '페이올라'(Payola) 사건이 연계되어 있기도 하다.

페이올라 사건은 특정 가수의 노래를 방송에서 많이 틀어주는 대가로 디스크자키가 뇌물을 받아 문제가 되었던 사건이었고, 척 베리의 노래 역시 이 사건에 휘말렸던 곡이기도 했다.

과정이 어찌됐건, 결국 페이올라 사건을 계기로 차트 상위권을 차지했던 'Maybellene'을 시작으로 'Roll over Beethoven', 'Rock & Roll music', 'Sweet little sixteen' 등의 곡을 히트시켰고 작사, 작곡 능력이 뛰어났던 척 베리는 백인들의 취향에 맞는 컨트리 음악의 요소가 물씬 풍기는 음악과 그만의 훌륭한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능력으로 로큰롤 음악 역사상 '로큰롤 음악의 위대한 작사가'로 꼽히기도 한다. 또한, 그의 열정적이며 현란한 기타 솔로 연주는 많은 기타리스트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후에 비틀스와 롤링 스톤즈가 척 베리의 음악에 큰 영향을 받아 그의 곡을 커버곡으로 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척 베리 역시 엘비스 프레슬리와 마찬가지로 1986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에 헌액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비치 보이스의 히트곡 'Surfin U.S.A'는 척 베리의 'Sweet little sixteen'의 가사와 제목만 바뀐 곡이기도 하다.


▲ 우리에겐 'Surfin U.S.A'로 더 익숙한 척 베리의 'Sweet little sixteen'

▶ 엘비스의 군입대 후 그의 자리를 메워주었던 비운의 스타, 버디 홀리(Buddy Holly)

엘비스 프레슬리와 빌 헤일리의 공연에서 오프닝 공연을 맡으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버디 홀리는
뛰어난 음악성을 가진 싱어송라이터였다.

1956년, 친구들과 함께 '크리케츠'(The Crickets)라는 로큰롤 밴드를 결성하여 유명가수들의 오프닝 밴드로 활약하며 스타덤에 올랐고, 앨비스가 군입대를 하던 시기에 엘비스의 빈자리를 메우며 백인 로큰롤 가수로서의 명성을 이어나갔던 가수이기도 했다.

1957년에 발표한 'That'll be the day'가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고, 1958년에는 'Oh! Boy!', 'Listen to me' 등을 히트시키며 화려한 나날을 보내던 버디 홀리는 데뷔 한지 5년도 채 되지 않은 1959년 2월 3일에 경비행기 추락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사기도 했다.

이 사고에서 사망한 사람은 버디 홀리 이외에도 '라밤바'로 유명한 리치 밸런스(Ritchie Valens)도 포함되어 있다. 훗날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돈 맥클린(Don Mclean)이라는 가수가 'American Pie'라는 제목의
헌정 곡을 만들어 히트시키기도 했다.


▲ 버디 홀리의 히트곡 중 하나인 'Oh! Boy!'. 특유의 경쾌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 로큰롤 스타에서 목사로, 목사에서 다시 로큰롤 스타로.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

엘비스 프레슬리와 함께 RCA에 소속해 있던 리틀 리처드는 1955년에 'Tutti Frutti'라는 곡을
크게 히트시키며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1956년~1957년 중반까지 'Long Tall Sally', 'Rip It Up', 'Jenny, Jenny', 'Good Golly, Miss Molly' 등의 다양한 히트곡을 내며 활동하던 그는 돌연 1957년 후반에 가수로서의 은퇴를 선언하며  목사의 길로 전향했다가 다시 1964년에 로큰롤 가수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1979년부터 목사로 다시 전향, 한때 자신이 몸담았던 로큰롤 뮤직을 사악한 음악이라 칭하며 로큰롤계의 이단아 같은 행보를 이어가던 그는 결국, 1980년대에 대중음악계로 다시 복귀하며 엉뚱하고 이색적인 경력을 자랑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유의 내지르는 강렬한 샤우팅 창법으로도 유명하며, 로큰롤뿐만 아니라 가스펠 가수로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 리틀 리처드의 히트곡 'Titti Frutti'

▶ '미스터 피아노 킬러' 제리 리 루이스(Jerry Lee Lewis)

미국의 유명잡지 '롤링스톤'지가 선정한 100인의 위대한 세계 대중음악가 중의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던 제리 리 루이스는 아주 폭발적이고 또한 엽기적인 피아노 연주와 무대매너로 사랑을 받았던 로큰롤 가수이자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다.

피아노 위로 올라가 피아노를 밟으며 노래하기도 하고, 피아노 건반을 때려 부수듯이 연주하기도 하는 모습으로 인해 '미스터 피아노 킬러'(Mr. Piano Killer) 혹은 '더 킬러'(The Killer)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56년, 'Crazy Arms'라는 곡으로 데뷔한 그는 뛰어난 음악성과 연주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상당한 트러블메이커 이기도 했다.

13살의 사촌 여동생과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보수적이었던 미국 사회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 이 결혼이 제리 리 루이스의 23살 나이의 세 번째 결혼이었다는 것 역시 충격적이었던 것.

빠르게 몰락해갔던 1950년대 말~1960년대 초반의 로큰롤 시대에 그 역시 스캔들로 인해 잠시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1960년대부터는 컨트리 뮤지션으로 전향하여 다시 인기를 얻기도 했다.


▲ 1958년에 히트했던 제리 리 루이스의 'Great balls of fire' & 'Breathless'

[도움말] '음악잡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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