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국내초청작 판소리 '여보세요' 리뷰

   
 

[문화뉴스] 지난 20일부터 22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2016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국내초청작으로 '판소리만들기-자'의 '여보세요'가 공연됐다. 문학과 판소리의 만남은 대단한 시너지를 낳았다. 아주 평범한 낱말들이 익살스러운 소리들과 맞물리니, 일상의 새삼스러움에 감탄하고 짓궂을 정도로 적확한 표현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예술감독 이자람을 필두로 한 '판소리만들기-자'는 판소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여 공연하는 단체다. 지난 10년간 '억척가', '사천가', '이방인의 노래' 등 현대문학작품과 판소리의 접점을 찾아 우리 시대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타고난 소리꾼 이자람은 올해 두산아트랩 쇼케이스를 통해 김애란의 소설 '노크하지 않는 집'을 원작으로 하는 또 하나의 영민한 현대 판소리 공연을 만들어냈다.

 

   
 

이자람이 연출을 맡은 '여보세요'에는 소리꾼 이승희와 고수 이향하가 출연한다. 이야기의 주인공 '승하'는 "보면 볼수록 나도 닮고, 너도 닮고, 우리 모두를 닮은" 가장 평범한 2, 30대 여성의 표상이었다. 1.5층에 위치한 ㄱ자 모양의 하숙집에 사는 초보 자취생 승하는 늦은 아침에 일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다녀오고, 잘 풀리지 않는 취업 문제로 지방에 계신 엄마와는 전화로 곧잘 싸운다. 얼굴을 마주치거나 통성명을 나눈 적 없는, 같이 사는 네 명의 여자들에게 사소한 불평조차 말할 수는 없는 그녀는 아주 평범한 우리의 모습 자체다.

 

   
 

승하는 잃어버린 신발과 속옷이 도로 자신의 방에 돌아와 있었던 사건을 통해, 범인이 같이 사는 네 명의 여자들 중 하나라 생각하며 잔뜩 화가 난다. 분노는 타인과 나의 위치를 철저한 분리 속에 상정시킬 때 생기는 감정이다. 그녀는 네 명의 타자들에게서 본인의 그 어떤 그림자도 찾지 못한 채, 네 여자가 모두 집을 나간 사이, 그들의 방을 모두 강제로 열어버린다. 그리고 그녀가 마주한 것은, 그녀 자신.

집에는 다섯 개의 승하 방, 그리고 다섯 명의 승하가 살고 있었다. 우울한 책상과 의자, 생리혈이 묻은 이불보, 옷가지가 너부러진 행거, 값싼 화장품으로 채워진 책장. 똑같은 구조 속에 똑같은 삶의 방식을 펼쳐 놓은 이 다섯 여자들은 어쩌면 똑같은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네들은 서로의 삶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아니, 침범할 수 없다. 결국 승하가 찾은 '외로운 나'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또 다시 고독한 메아리.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구세요? 끊지 마세요……."

타인의 일상 공간에서 마주한 나의 일상. 눅눅하고 가혹한 내 현실을 목도하게 된 순간, 그녀가 붙잡을 것은 휴대폰뿐이다. 상대가 누구여도 상관없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혼자가 아니길 간절히 원할 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 아무 번호를 두들기던 그녀는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물리적 거리로는 가까이 있으나 심적 거리로는 가까이 있지 않은 사람을 부르는 말, 전화기로 들리는 음성 너머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맨 처음 내뱉는 말, '여보세요'. 물리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혼자만의 시공간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던 우리에게, 승하가 보여준 소슬한 일상은 몰지각한 자신을 지각하게 되는, 곧 각성의 순간이 됐다. 그리고 그들은 그 충격적인 어둠의 시공간을 견뎌야 할 우리에게 "힘내", "괜찮다"라는 말이 아닌, "나도 그런 적 있어"라는 가장 심심(甚深)한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한편, "목소리는 없고 움직이는 소리만 가득한 이곳"을 묘사하는 예민한 관찰력이 촘촘하고도 맛깔스러운 판소리의 표현력과 만났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소리'로 표현하는 그들의 놀라운 능력은 수용자(관객, 독자)들 개개의 상상적 시공간을 구체적으로 구성하게 해주었다. 또한 특별할 것 없어 뵈는 이 평범함을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게 재현한다는 능력은, 판소리가 현대적으로도 관객들과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타자와 나, 그리고 나와 나의 사이에 "너무 두꺼운 방패를 세우고 사는 건 아닐까"라고 묻는 이 공연은, 판소리와 나의 사이에도 "너무 두꺼운 방패를 세우고 살았던 건 아니었을까"라고 자문하게 만드는 공연이 되어버렸다.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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