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시민들의 공공미술 작품 / 사진=오혜재
파리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시민들의 공공미술 작품 / 사진=오혜재

[문화뉴스 칼럼니스트 오혜재] 내가 사는 동네의 쓰레기 재활용 분리수거장은 지하주차장에 위치해 있다. 회색 일색의 지하주차장에는 고철 덩어리인 자동차가 주는 차갑고 딱딱한 아우라(aura), 지하 특유의 어둠과 퀴퀴함이 부유(浮遊)한다. 쓰임이 다한 물건들이 저마다의 ‘환생’을 고대하며 몰려드는 분리수거장에서는 기계적으로 ‘놓고 가는’ 주민들과 묵묵히 ‘정리하는’ 담당자들의 역할이 쳇바퀴처럼 반복된다.

여느 날처럼 분리수거장에서 ‘감흥 없는 의무’를 다하고 있던 중, 나는 이 잿빛 공간에서 작은 변화를 감지했다. 분리수거장의 벽에는 미술작품 몇 점이 걸려 있었다. 소위 ‘이발소 그림’ 수준의 어설프고 흔한 그림들이었지만, 흔치 않은 광경에 호기심의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벽에 걸리는 그림들은 점점 더 늘어갔고, 유리, 플라스틱, 비닐, 고철, 종이, 헌 옷가지로 채워진 수거함들과 기대 이상의 조화를 이루었다. 이제 벽면이 그림들로 가득찬 분리수거장은 나에게 허름하지만 빛나는 미술관이 되었고, ‘이번에는 또 어떤 그림이 기다리고 있을까’하는 설렘에 분리수거하러 가는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 비평가였던 아서 C. 단토(Arthur C. Danto)는 1984년 ‘예술의 종말’을 주창했다. 이는 예술의 무의미함이나 죽음이 아닌, 예술을 이해하고 비평하는 일정한 방식의 종말을 뜻한다. 단토는 평범한 대상과 예술품의 차이가 이제 그 형태가 아니라 ‘해석 과정’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파리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시민들의 공공미술 작품 / 사진=오혜재
파리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시민들의 공공미술 작품 / 사진=오혜재

그의 이론적 토대가 된 것은  ‘일상’과 ‘예술’의 경계에 대한 신박한 화두를 던졌던, 현대미술의 거장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과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작품들이었다. 뒤샹은 1917년 남성용 변기를 활용한 작품 ‘샘’(Fontaine)을 통해, 기성품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레디메이드’(ready-made) 개념을 창안했다. 워홀은 1964년, 마트에서 판매되는 ‘브릴로’라는 알루미늄 광택제 박스를 그대로 재현해 ‘브릴로 박스’라는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1967년 영국의 미술행정가 존 월렛(John Willett)은 자신의 저서 『도시 속의 미술』(Art in City)에서 ‘공공미술’(Public Art)의 개념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공공미술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아트 디렉터, 화상, 큐레이터, 평론가, 수집가 등 소수의 특정계층만이 영위하지 않고, 일상을 통해 누구나 피부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미술이다.

한국의 경우 1988년 아시안게임 및 서울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도시 환경 개선의 차원에서 공공미술에 대해 제도적 관심과 지원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한국은 「문화예술진흥법」, 「국민체육진흥법」 등의 법률에 기반해, ‘건축물 미술장식 제도’(1%법)와 ‘공공미술 지원사업’이라는 2가지 정책을 중심으로 정부 주도의 공공미술이 추진되어 왔다. 그러나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상’, 청계천의 다슬기 모양 조형물 ‘스프링’이 우리 곁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퍼즐 한 조각이 비어있는 허전함을 지우기 어려운 것은 왜일까.

파리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시민들의 공공미술 작품 / 사진=오혜재
파리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시민들의 공공미술 작품 / 사진=오혜재

올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창립 50주년을 맞아, <당신에게 문화예술은 무엇입니까?>라는 주제로 대국민 인식조사를 실시했다.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응답자들은 문화예술의 가치를 높이 인식하고 있었으며, 문화예술이 국민의 정서 함양, 치유, 즐거움 등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문화예술의 향유와 소비에 있어 접근성이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 의견을 같이했다.

이번 인식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공공미술의 개념과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일정 수준 형성되어 있다. 다만 일상에서 예술이 공기만큼이나 가깝고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려면 관 주도의 ‘탑 다운’(top-down) 방식만이 아닌, 시민 참여에 기반한 ‘바텀 업’(Bottom-up) 방식이 국내 공공미술 영역에서 보편화될 필요가 있다. 결국 문화예술의 최종 수요자는 국민이며, 이들이 ‘수동적 감상자’에서 ‘능동적 참여자’가 될 때 예술이 사회 구성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발전하게 될 것이다. 

2010년, 잠시 살았던 파리에서 나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 공작소’가 될 수 있음을 느꼈다.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 센터를 가지 않아도 5층짜리 다세대 주택 건물, 녹슬고 오래된 문의 손잡이, 낡은 두꺼비집에서 이름 모를 시민들이 자유롭게 남긴 예술의 발자취를 볼 수 있었다. 시민 모두가 예술가인 도시, 예술과 한 몸이 된 도시 속에서 파리 시민들은 한층 다채롭고 풍요롭게 각자의 삶을 가꾸어 나갔다. 그렇게 한국에서도 예술이 보다 친근하게, 보다 파격적으로 걸어들어올 수 있으면 좋겠다. 미국의 소설가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말처럼, “삶은 예술을 위한 지원 시스템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니까. 

필자 소개

사진=독학예술가 오혜재
사진=독학예술가 오혜재

독학 예술가(self-taught artist) 오혜재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 학사(언론정보학 부전공)와 다문화‧상호문화 협동과정 석사 학위를 받았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2014년부터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려왔다.

2019년 홍콩 아시아 컨템퍼러리 아트쇼를 통해 해외에도 작품을 선보이면서, 국내외 다양한 예술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2020년 싱가포르 아시아예술협회(AAA) 주최 <코로나19 국제 자선 그림 공모전>에서 아티스트 부문 금상을 수상했고, 2021년 이탈리아 현대작가센터(COCA) 주최 <제3회 COCA 국제 공모전> 1차 선정 작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2023년에는 <제3회 갤러리한옥 불화·민화 공모전> 특선 수상, 독일 기후예술컬렉션(CAC) 선정 작가, 홍콩 <아웃사이더 아트 VR 전시회> 2등상 수상을 달성했다.

직장인이자 저술가이기도 한 오혜재는 2007년부터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 근무하고 있다. 예술서로는 『저는 독학 예술가입니다』(2021)와 『독학 예술가의 관점 있는 서가: 아웃사이더 아트를 읽다』(2022)가 있으며, 예술 비평문과 칼럼도 꾸준히 기고하고 있다. 다년간의 국제 업무 경험과 석사 전공을 토대로, 예술을 통해 다양한 문화 간 이해와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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