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동성애자, 말더듬이...고독했던 '인간' 튜링의 삶 그린 작품
객석 오가는 4면 무대 활용 돋보여
튜링 역 고상호, 멀티 배역 이승주 열연 눈길
11월 25일까지 LG아트센터 U+ 스테이지

사진=연극 '튜링머신' 공연 장면 / 크리에이티브테이블석영 제공
사진=연극 '튜링머신' 공연 장면 / 크리에이티브테이블석영 제공

[문화뉴스 장민수 기자] 연극을 보는 이유가 뭔가. 배우의 연기? 이야기가 주는 감동? 혹은 무대 미학? 뭐가 됐든 '튜링 머신'에는 연극에 기대하는 모든 가치가 담겼다.

'튜링머신'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복잡한 암호 매커니즘 에니그마를 해독한 인물인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의 전기를 다룬다. 프랑스 작가이자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는 브누아 솔레스(Benoit Solès)의 작품으로, 이번이 국내 초연이다.

강도 사건을 신고한 튜링을 로스 중사가 취조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천재였지만 비극적이었던 튜링의 삶이 현재와 과거, 서술과 회상을 오가며 그려진다. 남들과는 조금 달랐던 사랑의 방향, 다수를 구하기 위해 소수를 희생시켜야 했던 가슴 아픈 선택. 침묵과 고독으로 가득 찼던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나면, 절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진=연극 '튜링머신' 공연 장면 / 크리에이티브테이블석영 제공
사진=연극 '튜링머신' 공연 장면 / 크리에이티브테이블석영 제공

튜링은 컴퓨터의 아버지이자 AI의 개념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이다. 기계는 생각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사람과 다른 건 뭔가. 이성과 본능, 정신과 육신의 관계에 대해서도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을 가진 인간이었지만, 다르다는 이유로 기계처럼 차갑게 식어야만 했다. 그 모순 가득한 사회 속에서 정체성을 고민하고 외롭게 존재하는 튜링의 모습이 재차 울림을 안겨준다.

이 같은 튜링의 삶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4면 무대가 돋보인다. 배우들은 중앙 원탁의 테이블부터 객석, 통로를 오가며 사방에서 연기를 펼친다. 그 입체감 덕에 관객은 이야기 속으로 더욱 빠져들게 된다. 

또한 푸른색의 무대 세트와 사과, 사진, 신발 등 하나의 챕터를 예고하는 오브제, 이를 비추는 조명의 조화도 세련됐다. 상징 가득한 무대 미학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무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사진=연극 '튜링머신' 공연 장면 / 크리에이티브테이블석영 제공
사진=연극 '튜링머신' 공연 장면 / 크리에이티브테이블석영 제공

앨런 튜링 역은 고상호가 맡았다. 말더듬이이자 동성애자, 천재. 하나만 연기해도 쉽지 않을텐데 이 세 가지를 모두 소화한다. 물론 외적인 특징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튜링이 간직한 고독과 슬픔까지, 그의 얼굴 표정과 대사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승주는 튜링을 수사하는 미카엘 로스 중사와 튜링의 라이벌인 휴 알렉산더, 튜링의 연인이었던 아놀드 머레이까지 멀티 배역을 소화한다. 목소리 톤부터 말투, 걸음걸이까지 모두 다르게 표현한다. 2인극이지만 풍성하게 보이는 건 분명 두 배우의 힘일 것.

각각의 짧은 에피소드들이 그 자체로 긴장감을 부여한다. 전체 서사를 놓고 보더라도 지루함을 느낄 틈 없이 빼곡히 압축돼 있다. 다만 튜링에 대해 전혀 모르는 관객이라면 이야기에 몰입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다. 그에 대해 알고 보는 것이 극을 훨씬 깊이 있고 재밌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겠다.

한편 '튜링머신'은 오는 25일까지 LG아트센터 U+ 스테이지에서 공연된다. 

문화뉴스 / 장민수 기자 jms@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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