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의 깊은 물안개, '무진기행'과 닮아 있어
지적이고 감각적인 문체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

순천만 일대. / 사진=순천시 제공
순천만 일대. / 사진=순천시 제공

[문화뉴스 이유민 기자] 한국 소설 역사에서 손꼽히는 작가인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소개한다.

작가 김승옥은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이때 그가 자란 곳이 순천이다. 불문과에 진학해 외교관을 꿈꾸던 그는 1962년 '생명연습'으로 문단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만 24세에 동인문학상을 수상하고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평을 받으며 한국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소설로 빛낸 60년대를 지나 70년대에는 시나리오 작업에 열중했다. '영자의 전성시대' 말고도 '겨울여자', '어제 내린 비' 같은 각본들이 세상에 나왔다. 생계 유지를 위해 선택한 길이기도 했지만 그는 산문집에서 "영화 쪽이 더 소질에  맞는 것 같아서"라고 소탈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다 김승옥은 절필했다. 동아일보에 '먼지의 방'이라는 장편소설을 연재하다 5·18 민주화운동이 시작되고 검열에 영향을 받은 까닭이었다. 이전에 이미 민주주의가 부서지는 현장을 목격한 그로서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무진기행'의 줄거리를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주인공 '윤희중'은 사별한 상태였던 아내와 결혼했다. 그리고 처가의 도움으로 제약회사 전무가 될 예정이다. 그는 고향에 '무진'에 내려가 어머니의 묘를 돌아보려고 하는데, 세무서장으로 있는 친구 '조'와 그를 존경한다는 국어 선생인 후배 '박 선생', 그리고 음악 선생으로 내일하는 중이지만 마음으로 서울을 꿈꾸는 '하인숙'을 만난다. 하인숙과 윤희중은 짧은 사랑을 나누지만, 윤희중은 서울에서 전보를 받고 무진을 떠난다. 그는 떠나기 전 하인숙에게 편지를 쓰려 하는데 그마저도 찢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작품을 읽다 보면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 같은 안개 속에 독자 또한 감겨든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뚜렷이 존재하는, 사람들을 둘러싸는,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는 무진의 안개는 마치 부유했다가 어느 순간 스르르 사라지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상징 같기도 하다.

실제로 순천만 대대포구를 찾아가면 안개에 얽매인 풍경을 만나볼 수 있다. 가시거리가 지극히 줄어들고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안개가 걷히면 광활한 절경이 펼쳐진다. 흐리고 모호했던 때는 온데간데 없다는 듯 생명력이 넘치는 인상으로 변모한다. 이런 대조가 오히려 서늘한 감각을 남기는데, 역시 명물이 아닐 수 없는 현상이다.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려면 1960년대 우리 사회의 변화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한국은 1960년대 산업화에 돌입하며 물질주의와 사회적 갈등이 불거졌다. 거기서 김승옥이 포착한 것은 속속들이 등장하는 '속물'들, '출세'에 집착하는 사회 속에서 방황하는 개인이었다. 그의 언어에는 세상을 어찌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쓸쓸함과 모순이 담겨 있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면 해방 후 '첫 한글세대'인 그의 이야기를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한편, 김승옥은 2003년 뇌졸중을 겪으며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2004년에 산문집을 출간했고, 2007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출간 작업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고 알려졌다.

현재는 뇌졸중 후유증을 앓고 있지만, 2015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소설 작업을 더 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결코 이전과 같을 순 없겠지만, 그의 새 문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라는 한국문학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순천만국가정원의 비오톱습지. / 사진=순천시 제공
순천만국가정원의 비오톱습지. / 사진=순천시 제공

우리는 김승옥의 작품을 곳곳에서 느끼고 찾아볼 수 있다. '무진기행'을 포함한 소설들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소개됐고, 그의 이름을 딴 '김승옥문학상'이 다시 활발히 운영되고 있기도 하다. 그의 다른 대표작 '서울, 1964년 겨울'의 배경을 따라가는 문학기행이 이뤄지고 순천에서는 순천문학관 김승옥관을 만들었다. 그가 열정적으로 작품을 집필했던 시기는 아주 길다고 보기 어렵지만 그 빛은 시들지 않고 있다.

김승옥은 위에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20대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으로 '무진기행'을 꼽았다. 서울과 무진 사이에서 불안하게 줄을 타는 주인공 윤희중의 모습은 이 시대 청년들이 읽어도 크게 공감할 만하다. 순천을 찾는다면, 안개를 본다면, 삶이 어지럽다면 이번 기회에 '무진기행'을 읽어보는 게 어떨까.

* '고전', '명작'으로 꼽히는 각종 문학들은 읽을수록 풍부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힘을 건네준다. 이런 작품들은 각종 미디어에서 인용되고, 오마주되고, 다시 읽히곤 한다. 그러나 '오래됐다', '어렵다'는 이유로 널리 읽히지 않는 작품들도 많다.

그에 따라, 이 기사는 최근 다시 주목받는 작품들에 접근하기 쉬운 발판처럼 쓸 수 있도록 기획됐다. 이 기획에는 기사를 읽는 5분 사이, '세 줄 요약 해주세요' 대신 '더 읽어보고 싶어요'를 선택하는 독자들이 많아지길 바라는 소소한 마음이 담겼다.

이번 기사에서 김승옥의 산문집이라고 소개한 책은 '내가 만난 하나님(2004, 작가)'이다.

다음 주에는 '5분 세계명작'의 마지막 코너로, 세계명작 코너에 걸맞게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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