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종 칼럼] 한국 경제의 해묵은 뇌관인 가계부채 경고음이 갈수록 커가고 있는 가운데, 3곳 이상의 금융기관에서 빚을 낸 가계대출 ‘다중채무자’ 수가 또다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게다가 이들 4명 중 한 명은 최소 생계비를 뺀 나머지 소득의 대부분을 빚 갚는 데 쓰고 있다. 가계 빚의 약한 고리가 더욱 위태로워지고 있다. 가계부채 관리엔 기준금리 인상이 효과적이지만, 쉽사리 꺼낼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 한국은행은 태영건설 워크아웃이 난항을 걷고 있는 데다 섣불리 금리 인상 시 자칫 프로젝트파이낸싱(PF)발 경제위기 뇌관을 건드릴 우려가 있어 신중한 입장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빚에 짓눌린 취약계층 중에선 불법 사채의 함정에 빠진 이들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 2월 12일 한국은행이 국회에 제출한 ‘다중채무자 가계대출 현황’ 자료에 따르면 작년 3분기 말 현재 국내 가계대출 다중채무자는 450만 명으로 집계됐다. 한국은행이 자체 가계부채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분석한 결과로, 다중채무자는 3곳 이상의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은 차주를 말한다. 고금리에 가장 취약한 만큼 한국은행과 금융당국의 집중 감시·관리 대상이다. 이들 다중채무자 450만 명은 직전 분기인 2023년 2분기 448만 명보다 2만 명이나 늘어난 역대 최다 기록인 데다 다중채무자가 전체 가계대출자 1,983만 명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2.69%로 사상 최대 수준이다. 이들의 전체 대출 잔액은 568조 1,000억 원으로 1인당 평균 대출액은 1억 2,625만 원에 이른다. 지난해 부동산 관련 대출을 중심으로 전체 가계대출이 증가세로 돌아서다 보니 다중채무자도 그만큼 늘어났다. 여기에 고물가와 고금리가 장기화하면서 생활자금이 부족해 추가로 대출받은 생계형 다중채무자도 늘어난 것으로 해석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단순히 다중채무자 수만 늘어난 게 아니라, 경제 지표상 이들의 상환 능력도 한계에 이르렀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커지고 있다. 대출 한도와 높은 금리 등으로 추가 대출을 받아 ‘빚 돌려막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다중채무자의 평균 연체율(1개월 이상 원리금 연체 기준)은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1.5%로 추산됐다. 2019년 3분기(1.5%) 이후 4년 만에 가장 높은 연체 수준이다. 상세히 속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더욱더 심각하다. 통상 당국과 금융기관 등에서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이 70% 안팎이면 최소 생계비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 소득으로 원리금을 갚아야 하는 상황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 대출 원리금과 세금 등을 내면 소비 여력이 거의 없는 상태로 본다. 이들의 DSR은 58.4%에 이른다. 소득의 60% 가깝게 빚 갚는 데 쓴다는 얘기다. 심지어 전체 다중채무자(450만 명) 가운데 DSR이 70%를 넘는 비중도 26.2%인 118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심지어 14.2%인 64만 명은 100%를 웃돌아 아예 갚아야 할 원리금이 소득보다 많다는 뜻이다. 전체 가계대출자로 대상을 넓히면, DSR이 70%를 넘은 차주는 279만 명(14.0%)으로 70∼100%는 117만 명, 100% 이상은 162만 명에 이른다.

다중채무자 가운데 소득과 신용도까지 낮은 대출자들의 상환 부담은 더욱 심각한 수준이다. 저소득(소득 하위 30%) 또는 저신용(신용점수 664점 이하) 상태인 다중채무자를 ‘취약 차주’로 정의하는데, 지난해 3분기 말 기준으로 취약 차주의 평균 DSR은 63.6%였고, 취약 차주 가운데 35.5%(46만 명)의 DSR이 70% 이상이었다. 이들의 대출은 전체 취약 차주 대출액의 65.8%(63조 4천억 원)를 차지했다. 한국은행도 지난해 말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취약 차주, 비은행금융기관의 가계대출 연체율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등 취약 부문의 대출 건전성이 저하되고 있다.”라며 “차주의 DSR이 오르면서 소비 임계 수준을 상회(上廻)하는 고(高)DSR 차주가 늘어날 경우, 이는 곧 차주의 소비성향 하락으로 이어져 장기에 걸쳐 가계소비를 제약할 수 있다.”라고 경고한 바 있다. 신용도가 낮은 이들은 이자가 높은 제2금융권이나 대부업체로 몰려가는 풍선 효과까지 일어나고 있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순환의 연속인 셈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취약 차주의 연체율은 8.86%로 같은 기간 비취약 차주의 연체율(0.35%)보다 25.3배 높다. 문제는 이들의 연체율이 더 뛸 수 있다는 점이다. 전체 가계대출자 가운데 취약 차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3분기 기준 6.5%로 2020년 3분기(6.5%) 이후 3년 만에 최대다.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위험 수위를 넘은 지 오래다. 최근 5년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에 견준 가계부채 비율은 가파르게 오르면서 비교 가능 26개 나라 가운데 최고 상승률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제통화기금(IMF)은 GDP의 108%에 달하는 가계부채를 경고하고 나섰다. 지난해 IMF ‘세계부채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한국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17년 92%에서 지난해 108%까지 치솟았다. 국제금융협회(IIF)의 최신 보고서에서도 조사 대상 34개국 중 지난해 3분기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00%를 넘는 곳은 한국이 유일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신용카드 연체율 증가도 심각하다. 특히 서민들의 급전 창구라고 불리는 ‘리볼빙’ 서비스에 경고등이 켜졌다. 8개 전업카드사(KB국민·롯데·비씨·삼성·신한·우리·​하나·​현대)의 리볼빙 잔액은 2023년 3분기 누적 7조 5,115억 원으로 사상 최대를 돌파했다. 고(高)신용자가 연말 성과금으로 카드 연체를 갚으면서 2023년 말에는 7조 4,377억 원으로 소폭 감소했으나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2월 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까지 누적된 전업카드사의 1개월 이상 총연체액은 2조 500억 원을 넘어섰다. 전년 동기 1조 3,000억 원 대비 약 57%나 급증한 것이다. 국내 8개 카드사 체제가 만들어진 2014년 이후 최대치다. 특히 청년층이 새로운 부실의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 20대의 리볼빙 잔액은 2019년 말 기준 약 4,300억 원에서 지난해 3월 말 5,600억 원으로 무려 30%가량 급증했다. 20대 청년들은 소득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성이 더 크다.

문제는 고금리로 이들의 상환 능력이 한계에 부닥쳤다는 점이다. 고금리 장기화로 당분간 가계부채와 연체율은 상승세를 이어 갈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금리가 크게 낮아지지 않는 한 상황이 개선되기는 어려운데, 당초에 3월로 기대됐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기준금리 인하 개시 예상 시점은 계속 뒤로 미뤄지고 있다. 가계대출 시한폭탄의 ‘뇌관’이 금융 위기로 튕기지 않도록 선제 대응에 나서야만 한다. 정부는 옥석 가리기와 더불어 채무조정 프로그램 정비 등 금융 취약계층의 상환 부담을 줄이는 특단의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지금은 금융권의 역할과 책임이 여느 때 보다 더 크고 더욱더 절실하다. 이곳 저곳에서 빚 독촉에 시달리는 서민 취약 차주들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이자가 연 수백에서 수천 %에 이르는 불법 사금융의 함정에 빠져들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정부는 다중채무자를 지원하기 위한 저리 대출 전환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하고 강화하는 한편 불법 사금융 피해를 줄이기 위한 철저한 단속에 나설 필요가 있다.

금융당국은 선제적인 다중채무 위험 관리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그렇다고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는 선심성 정책에 치우쳐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옥석 가리기가 시급하다.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는 차주들의 부담을 덜어 연착륙을 도울 비상 처방전을 면밀하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자구 능력이 없는 차주에 대해서는 개인회생 절차 등의 퇴로를 열어주어야 한다. 금융기관 또한 ‘충당금’을 더 쌓고 ‘손실 흡수 능력’ 강화 등으로 만약의 사태에 철저하게 대비할 필요가 있다. 가능성이 낮은 금융 여건 호전에 섣부른 기대감을 품는 치둔(癡鈍)의 우(愚)보다 금융 위기는 부실 대출에서 비롯된다는 경험칙을 반추할 시점이다. 다중채무자와 취약 차주가 손실 흡수 능력이 취약한 제2금융권에 몰려 있는 만큼 방심은 금물이다. DSR 규제의 우회 정도로 문제를 풀려고 든다면 상황인식 부족이 아닐 수 없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땜질식 미봉책(彌縫策)은 금물이다. 또한 지난해 12조 원의 순이익을 낸 4대 시중은행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정치권의 압박에 마지못해 내놓는 졸속 방안 정도가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는 차원에서 대출금리 조정 등 신속하고 실효성 있는‘통 큰’ 상생 방안을 통해 윈-원(Win-Win)할 수 있도록 보호 대책을 서둘러 마련하여 다중채무자들 특히 취약 차주의 연착륙을 도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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