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있는 날·예술이 있는 삶을 빛냅니다…문화뉴스] '아이 킬드 마이 마더'. 제목부터 이목을 끄는 이 영화는 개봉 예정인 '마미'와 더불어 '하트비트', '로렌스 애니웨이' 등 심심찮게 칸의 부름을 받은 젊은 신예이자 젊은 거장 자비에 돌란의 데뷔작이다. 

데뷔작인 만큼 이후 작업한 영화들에 비해서는 완숙미가 떨어진다는 평도 있으나 '아이 킬드 마이 마더'가 도전적인 수작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자비에 돌란 감독이 16살일 때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출연한 자전적 영화, '아이 킬드 마이 마더'. 영화는 주인공 소년 후베르트의 차분한 독백을 시작으로 관객들을 천천히 끌어당긴다.

17살 사춘기 소년 후베르트. 그는 엄마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하다. 자신을 이해해주기는커녕 제멋대로 행동하는 엄마에게 진절머리가 난 후베르트는 그의 연인 안토닌과 함께 자유로운 독립을 꿈꾼다. 그러나 엄마의 눈에 후베르트는 그저 철없는 사춘기 소년으로 보일 뿐이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는 상상치도 못했던 아들의 비밀을 전해 듣게 되는데. 영화의 줄거리만 나열해 보자면 이런 식이다. 그러나 주인공 후베르트의 가면을 쓴 자비에 돌란 감독이 영화 속에 풀어 놓은 감정들은 차마 몇 줄 안에 요약되기 힘들다.

후베르트와 그의 엄마 샨탈은 모자지간을 떠나 성격, 습관, 대화 방식 등 모든 면에서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나 잦은 다툼과 불화를 겪으면서도 후베르트와 샨탈은 포기할 듯 포기하지 못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끌어안으려 한다. 이런 둘의 모습은 마치 서로 톱니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 두 개가 억지로 맞물리려 애쓰는 모양새와 닮았다. 맞물려 돌아가기엔 너무나 다른 톱날에 튕겨져 나가기도 하고, 서로에게 긁힌 자국이 아파 또 언제는 스스로 멀어져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톱니바퀴는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끌리고 여전히 맞지 않는 아귀를 애써 맞춰보려 부단히도 노력한다. 우리가 부드럽게 맞물리던 시절도 있었는데. 과거를 안주 삼은 추억팔이는 잠깐의 윤활유일 뿐 부질없는 노력이다. 그렇다면 후베르트와 샨탈은 왜 서로 상처 입으면서까지 서로를 끌어안으려 하는 걸까.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맞지 않는 두 톱니바퀴일지라도 둘은 어머니와 아들의 역할을 숙명적으로 짊어졌다. 아무리 모질게 잘라낸다 하더라도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를 온전히 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사실 영화 속 후베르트의 말이 맞다. 만약 어머니와 아들이 아니었다면. 모자지간이 아니었다면 후베르트와 샨탈은 서로의 톱날이 닿지 않는, 서로의 공간을 존중할 수 있는 멀찌감치 떨어진 위치에서 평화로이 제각기의 회전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필요 이상으로 서로를 서로에게 끼워 맞출 필요도 없으니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들의 굴레 아래에서 후베르트와 샨탈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는 사명감,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애정에 시달린다.

상투적인 표현을 하자면 잔혹한 운명이다. 후베르트의 말마따나 부처님인지 하나님인지 알 수 없지만 저 위의 누군가가 맞지 않는 톱니바퀴들을 잘못 배열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엄마. 후베르트가 죽이고자 했던 것은 엄마 샨탈이 아니라 다만 '엄마'라는 굴레였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는 '엄마'라는 어찌 보면 일상적인 대상을 낯설게 그려냈다. 아마 이 영화를 인상 깊게 본 관객이라면 분명 집으로 돌아가 엄마, 혹은 나와의 관계를 기준으로 정의되어 왔던 사람들을 한 번쯤은 돌아보았을 것이다.

사색에 빠져 볼 만한 메시지, 자비에 돌란 만의 색채와 과감한 연출, 인상적인 사운드. 각박한 일상에 감성이 메말랐다면 소년의 애증과 '돌란 시그니처'가 담긴 '아이 킬드 마이 마더'는 좋은 선택이다.

문화뉴스 유하영 기자 young@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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