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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일 오후, 명동예술극장 로비엔 임홍식 배우를 기리는 꽃과 글귀가 놓여있었다. ⓒ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전략)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선생님과 저희 모두가 꿈꾸는 그 날까지, 그 날을 지나 미래의 어느 날에도 여전히 연극이 올라가기를 꿈꿉니다. 선생님, 좋은 곳에 자리 잡아 주세요. 저희도 갑자기 돌아보고 나서 곧 가겠습니다. 부디 영면하십시오. 다만 바라옵니다." -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연출 고선웅 올림.

지난 20일 오후,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이 열린 명동예술극장 로비엔 검은색 바탕, 흰 글씨의 글이 관객들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고선웅 연출이 남긴 '故 임홍식 연극배우를 기리는 글'이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19일 오후 9시경 임홍식 배우는 본인의 출연분량을 모두 연기하고 퇴장한 후 갑작스러운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며 의식을 잃었다. 즉시 심폐소생술을 받으며 인근 백병원에 옮겨 처치를 받았으나 끝내 오후 10시 19분경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 故 임홍식 연극배우 ⓒ 국립극단

임홍식 배우는 서라벌예술고등학교에서 연극을 시작해, 1978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 후, 본격적인 연극배우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1979년 극단 현대극장의 '피터팬', '실수연발', '종이연' 등에 출연했다. 이후 극단 전망, 극단 가교, 극단 민예, 극단 김상열연극사랑 등의 공연에 출연했고,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인천시립극단 상임단원으로 활동했다.

약 40년에 가까운 세월을 연극에 매진한 그를 지켜본 연극인들은 어떤 배우로 기억하고 있을까?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비롯해 그가 올해 출연한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허물', '차이메리카'의 세 연출가 고선웅, 류주연, 최용훈, 그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을 함께 연기한 장두이 배우, 그가 2010년 출연한 연극 '휘가로의 결혼' 연출을 맡은 구태환과 함께 등장한 배우 김태훈, 2003년 연극 '원효로1가 19번지'와 함께한 배우 박리디아, 그리고 1988년 등장한 연극 '불의 나라'의 연출이자 현재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인 주요철 연출의 말을 들어봤다.

   
▲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윤철 예술감독, 고선웅 연출(이상 ⓒ 문화뉴스 DB), 최용훈 연출(ⓒ PLAY DB), 류주연 연출 ⓒ 웹진 연극人n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 : 너무 화려한 배우는 아니었지만, 본인이 맡은 역할을 정성스럽고, 진지하고, 성실하게 임해서 어느 역할을 맡길 수 있는 그런 믿음직한 배우셨다. 후배들도 굉장히 아껴주시고, 동료들, 선배들과도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연극 못지않게 삶에서도 많은 사람에게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다. 이번에도 찾아오신 분 중엔 젊은 연극인들이 많았다. 한 번이라도 같이 겪으면 깊은 인상을 받을 만큼 인간미가 훈훈했던 그런 배우셨다.

고선웅 연출(2015년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연출) : 대쪽같은 분이셨다. 자신의 연기에 대한 프라이드가 매우 강하셨다. 연출가와의 작업에서도 트러블 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시며 존중해주셨다. 현장 자체를 유머러스하게 재밌게 끌고 가시던 정말 좋으신 분이셨다.

최용훈 연출(2015년 연극 '차이메리카' 연출) : 정말 양반이셨다. 본인 역할에 충실했고, 후배들에게 많은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분이셨다. 선비처럼 꼿꼿한 분이셨다.

류주연 연출(2015년 연극 '허물' 연출) : 연세와 비교하면 유연성이 있는 훌륭한 배우셨다. 연세가 있는 배우 중엔 옛날의 연기 스타일이나,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연기를 많이 하시는 분들이 있다. 선생님은 내가 만난 또래의 어떤 배우보다 작품 자체의 자기 역할에 충실히 하려고 하셨다. 과장됨 없이, 흔들림 없이 연기하셨다. 여기에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 권위적으로 후배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것 없이 젊은 후배 배우들에게 애정을 갖고 대하셨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젊은 후배 배우들이 많이 빈소에 찾아와 준 것 같다.

   
▲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배우 장두이, 주요철 연출, 배우 박리디아, 구태환 연출, 배우 김태훈 ⓒ 문화뉴스 DB

장두이 배우(2015년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출연) :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동년배처럼 같이 다니는 좋은 친구였다. 하루는 연습 중에 우리끼리 이런 이야기를 했다. 10여 년 전, 모스크바에서 아흔 살 된 배우가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을 보며 "요즘 연극계에 60대 이상이 할 수 있는 작품이 별로 없는데, 이렇게 좋은 작품에서 오래 90까지는 아니어도 죽을 때까지 연기하자"고 이야기했다. 갑자기 이번 공연에서 세상을 떠나니 이 가을과 겨울 사이 뭐가 하나 뻥 뚫린 느낌이었다. 굉장히 섬세한 성격의 분이었다. 일을 아직 더 많이 할 수 있는 나이에 아쉽게 떠나 안타깝다.

주요철 연출(1988년 연극 '불의 나라' 연출) : 1988년 '불의 나라'로 처음 연출자와 출연 배우로 만나게 됐다. 그 후 약 30년간 인연을 이어갔다. 점잖으면서 젠틀한 배우셨다. 상식이 항상 있었고, 진지하게 연습에 임했다. 살짝 마르면서 키가 좀 컸는데, 그 덕분에 정감있는 역할이 잘 어울렸던 배우였다.

박리디아 배우(2003년 연극 '원효로1가 19번지' 출연) : 극단 김상열연극사랑 작품으로 같이 공연했다. 연습장에 나타나면 안정감이 딱 들었다. 후배들과 같이 있으면 엄청나게 친절하고 다정다감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웃으셨다. 조용하게 그 자리를 지켜주시면서 끝나고 난 후, 소주 한잔 하는 걸 좋아하셨다. 표정으로 한 잔 하러 가자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무대에서도 연습장에서도 평상시에서도 자기중심을 잡고가는 배우셨다. 그러면서도 항상 전체의 분위기를 잡아가셨다. 마지막 호흡까지 연기로 불태우신 선생님의 열정, 좋은 곳 가셔서 마저 남은 2막 하시고 천상에서 박수받길 바란다.

구태환 연출(2010년 연극 '휘가로의 결혼' 연출) : 굉장히 유쾌하시고, 배려심이 많으셨다. 조용하시면서도 굉장히 자기 일을 묵묵히 하시는 선생님이셨다. 연습했을 때는 완전 젠틀맨이셨다. 전체를 위해 목소리를 내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셨다. 연출에 대한 불만도 전혀 없이 편안하게 연기해주셨다. 안타깝다.

김태훈 배우(2010년 연극 '휘가로의 결혼' 출연) : 이번에 충무아트홀에서 '에쿠우스'를 할 때 보러오셨다. 끝나고 소주도 한 잔 같이 했고, 시간이 늦어져서 집에 모셔다드렸었다. 정말 안타깝다. 신성함과 절대성을 갖고 계셨다. 사전에 준비를 굉장히 많이 하셔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 예로, '휘가로의 결혼'에서 '판사'를 하셨는데 당시 대사 중 '사소한' 대신 '소소한'이라는 말을 해야한다고 하셨다. 그땐, 요즘 '소소한'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니 '사소한'이 더 낫지 않나 싶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소소한'이라는 말이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가 언어를 구사하면서 좀 더 고급스럽고, 문학적인 말을 쓰려는 고민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준비가 큰 본보기가 된 것 같다.

문화뉴스 양미르·장기영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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