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암 홀든 X 잭 호킨스 주연
22일 오후 10시 35분 EBS1 방영
![사진 = [주말에 영화] 세계의 명화, 윌리암 홀든 X 잭 호킨스 '콰이강의 다리' / EBS 제공](https://cdn.mhns.co.kr/news/photo/202406/606805_742643_3510.png)
[문화뉴스 김혜빈 기자] 전쟁으로 인해 변화되는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장대한 영상으로 풀어낸 영화 '콰이강의 다리'가 22일 밤 10시 35분 EBS1에서 방영된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영국군 공병대는 동남아시아 전선에서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울창한 밀림 한가운데 있는 포로수용소로 끌려간다. 일본군의 포로수용소장인 사이토 대령(하야카와 세슈)은 니콜슨 대령(알렉 기네스)에게 콰이강을 관통하는 다리를 건설할 것을 명령한다. 지독한 원칙주의자인 니콜슨 대령이 제네바 협약에 따라 장교들은 노역에 참여할 수 없다고 버티자 사이토는 니콜슨을 독방에 가둬버린다. 하지만 다리 공사가 계속 지지부진해지자 사이토는 일본군의 지휘를 받지 않겠다는 니콜슨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한 달 만에 니콜슨을 풀어준다. 니콜슨은 포로로 전락해버린 부하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후세를 위해 다리를 건설한다는 신념으로 다리를 완공하는 데 성공한다.
한편 미 해군 소속 쉬어즈(윌리암 홀든)는 구사일생으로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콰이강의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에 투입된다. 포로로 붙잡힐 당시, 편하게 대우받기 위해 이등병이라는 계급 대신 중령이라고 속였던 사실이 발각된 것. 영국군 폭파전문가 워든 소령(잭 호킨스)은 특공대원 쉬어즈와 두 명의 자원병을 이끌고 콰이강의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에 나선다.
이 영화에서 니콜슨 대령은 일본군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지만 장교들도 강제노역에 동원한다는 일본 측 방침에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한다. 결국 포로수용소 소장인 사이토 대령과의 자존심 대결에서 승리한 니콜슨은 부하들을 독려해가면서 이적행위나 다름없는 다리 공사를 능동적으로 진행한다. 결국 군인으로서의 명예와 자존심에 대한 집착으로 다리를 완공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군의 특공대가 다리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다리를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든다. 다리를 지키려는 니콜슨 대령과 다리를 폭파하려는 영국군의 갈등은 이 영화의 주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무너지는 다리를 바라보며 니콜슨의 유명한 독백이 나온다. '내가 지금까지 뭘 한 거지?'. 그리고 영국군 포로 중 한 사람이었던 의무장교가 최후의 한마디를 외친다. '미쳤어! 모두 다 미쳤다고!'.
'콰이강의 다리'는 '혹성 탈출'의 원작자 피에르 불(Pierre Boulle)이 1954년에 쓴 프랑스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동시에 데이비드 린 감독이 '밀회 (Brief Encounter, 1946)'나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1946)' 같은 멜로나 문예물에서 서사시 형태의 대작 영화로 전환한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할리우드 자본으로 만들어졌으며 지금의 데이비드 린을 있게 한 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포로가 된 영국군 병사들이 '보귀 대령 행진곡(Colonel Bogey March)'을 휘파람으로 불며 행군하는 장면이 유명한데, 이 곡은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 아니고 1910년대에 영국에서 이미 만들어진 행진곡이다. 이 행진곡에 히틀러를 조롱하는 가사를 붙인 노래(Hitler Has Only Got One Ball)가 2차 대전기간 중에 유행했고, 데이비드 린 감독도 이 곡을 영화에 삽입하려 했으나 제작자의 만류로 휘파람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감독 데이비드 린은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콰이강의 다리'(1957), '닥터 지바고' (1965) 등의 대작을 만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영화계의 거장으로, 40년대와 50년대 영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그는 스튜디오 잡역부로 영화계에 입문해 30년대에는 꽤 촉망받는 편집기사로 이름을 날리고 전쟁드라마 '우리가 복무하는 곳'(1942)으로 감독 데뷔했다. 그 후 '밀회', '위대한 유산', '올리버 트위스트' 등의 세련된 영화를 찍었고, 50년대 중반 그는 할리우드의 자본을 바탕으로 '서머타임', '콰이강의 다리', '닥터 지바고'로 이어지는 대작을 연출했다. 그러나 그의 후기작품에 대한 평론가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평단의 집요한 비판에 의욕을 잃은 그는 1984년 '인도로 가는 길'(1984)을 내놓을 때까지 무려 14년간을 칩거상태로 보냈고, '노스트로모'를 기획하는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문화뉴스 / 김혜빈 기자 press@mhn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