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탈출-날숨의 시간' 리뷰

   
 

[문화뉴스]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 이들이 향한 곳은 희망의 땅.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그 '희망찬 땅'의 희망은 신기루 같았다. 보이지만 존재하지는 않는 것.

무대와 객석이 어두워지고 십여 명의 사람들이 슬금슬금 무대를 기어 다녔다. 실루엣조차 확실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고 민첩하게 돌아다니는 이들은 탈북자들. 극은 탈북자들의 긴박하고도 피로한 탈북 과정을 40여 분 동안 한 마디의 대사도 없이 행동과 소리, 조명 등을 통해 압축 묘사한다. 무대 위에 산만하게 놓인 박스들은 탈북자들의 길이 되기도 하고 걸림돌이 되기도 하며 은신처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동분서주한 뜀박질, 그리고 급박한 은둔, 몇 차례의 공안을 거쳐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그럼에도 희망에의 열정을 포기할 수 없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태국으로, 태국에서 한국으로. 이들은 국경 뿐 아니라 죽음의 문턱을 넘으며 겨우 희망의 땅을 찾는다. 그들에게 북한은 난사된 고통, 감금된 희망이 버무려진 지난한 땅이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남한. 새터민들은 각각 저마다의 방식으로 남한에 적응하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식당 주방 보조, 배달 및 편의점 아르바이트, 패스트푸드 캐셔, 러시아어 강사 등등 각종 생업에 도전하지만 '탈북자'이기 때문에 고용주와 고객으로부터 받아야하는 멸시와 불합리는 똑같은 수순으로 밟았다.

연극이 고맙고도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를 꼽자면, 바로 타인의 삶을 강렬하고도 세세하게 목격할 수 있게, 그리고 의식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점이다. 짧은 러닝타임 동안 우리는 배우가 묘사한 타인의 삶과 그 내면, 그리고 세세한 표정과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게 된다. 고선웅 연출가와 극공작소 마방진이 다함께 보여준 이번 '타인'은 바로 새터민이었다. 여러 새터민들 가운데서도 그들이 가장 주요하게 보여준 타인은 미선(양영미), 미영(이지현) 자매다.

 

   
 

뮤지컬배우와 무용수를 꿈꾸던 미선과 미영이 남한에 내려와 겪게 되는 비극은 누구나 알 만한, 그리고 예측 가능한 것들이었다. 탈북민들이 남한에서의 삶에 제대로 정착하기 힘들 때 어떤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소문으로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시선에 사로잡혔을 때, 더구나 그들의 고통스러운 과거의 일부가 우리 앞에 전개되며 그들의 삶의 서사를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을 때, 그 전개가 구구절절 이야기가 아닌 감각적인 움직임으로 구현됐을 때 관객들은 미선과 미영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사람이 된다. 우리는 그들과 유관(有關)해졌다.

 

   
 

연극 '탈출'의 부제는 '날숨의 시간'이다. 여기서 '날숨'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내쉬는 숨'과 '날 것의 호흡'이다.

연극은 들숨이 있으면 날숨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공간에서 어떤 이들의 체취와 감정들을 들이키지 않으려'는 우리의 모습을 지적하며 '그 어떤 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고 말한다. 탈북민들은 북한과 남한 경계에서 늘 '타자'가 되어야 했다. 연극은 우리 내부로 들여지지 않던 그 타자들을 그리며 타자화의 과정을 멈추자고 말한다. 그리고 그 설득은 관객들을 감정적으로 터치하며 이뤄진다.

 

   
 

그리고 또 하나, 연극 '탈출'은 극공작소 마방진의 1기부터 5기까지의 배우들이 모두 모여 합을 맞추는 자리가 되었다. 고 연출은 "이번 작품 역시 거침없는, 날 것의, 에너지틱한 마방진스러운 무대 언어로 재탄생 할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공연에서는 노련하고 개성 강한 마방진 1기 배우들로부터 풋풋한 5기 배우들까지 모두가 명랑하고도 힘이 넘치는 무대를 보여줬다. 특히나 오랜만에 마방진 무대에 선 이명행 배우의 모습도 무척이나 반가웠다.

마방진의 신파는 여운을 통해 감정을 증폭시킨다. 줄곧 숨 가쁘고 가슴 절절하게 달려오던 극이 맺음을 앞두고 얼마간의 쉼을 가진다. 눈물 흘릴 시간도 없이 신속하게 달려오다가 드디어 미선과 미영에게 목 놓아 울 시공간이 허락된 것이다. 그들이 '너무 멀리 온' 스스로의 모습을 자각하고 자신들을 위해 통곡하는 순간, 관객들도 그들의 처절한 일생에 함께 흐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연극 '탈출-날숨의 시간'은 25일 국립극장 KB 청소년 하늘극장서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있다.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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