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자극 아닌 논리로 말해야만 사람이다.

   
[글] 문화뉴스 아띠에터 조형근 kareljay@mhns.co.kr Temporary title : My dreams.

[문화뉴스] 한 남자가 있었다.

러시아의 9급 관리로서 정서를 담당하고 있는 그의 이름은, 본인의 직업처럼 아버지의 이름마저도 복사해버린 아까끼 아까끼예비치. 우리에게는 러시아의 대문호 니콜라이 고골의 작품 '외투'의 주인공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제목 '외투'에서 볼 수 있다시피 소설의 내용은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의 낡은 외투에서부터 새로운 외투, 그리고 잃어버린 새로운 외투를 찾기 위한 유령화 등 외투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 '외투'의 상징은 하나의 엄격한 계급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 초기 허름한 외투를 입은 아까끼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과 새로운 외투를 구입한 뒤 달라진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그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흙수저'라고 외치면서 사회의 부조리함과 삶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절규하듯 내뱉으며 이렇게 말한다. '흙수저는 아무리 해도 금수저를 이길 수 없다. 대한민국은 이미 계급사회가 되어 있고 계층 간의 이동은 불가능하다. 흙수저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라고.

'수저 계급론'에서 주장하는 핵심은 간단하다. 대한민국(또는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헬조선)에선, 더 이상 좋은 대학이나 대기업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게 성공이 아니다. 성공은 이미 정해져 있다. 태어나서부터 경제력이 뛰어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면 그 자손 또한 성공하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자식은 결국 그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주장의 핵심이다.

이 주장은 누구나 생각했을 만한 주장이고, 실제로 많은 사람이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물론 문제가 심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적절한 방어기제와 정책들은 필요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자본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단순히 나보다 상대방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니까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사람의 성숙한 성인으로서의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가엾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는 '수저 계급론자'들이 원론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에서는 필연적으로 자본이 하나의 권력이 되고, 자본의 크기에 따라서 계층이 나눠지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자본에서 소외된 계층이 발생하게 되고, 그 소외된 계층에서 일정량의 노동력을 제공하고도 정당한 대가를 보상받지 못하거나 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 이런 수저 계급론의 주장은 일정 부분 필요하다. 다만, 그들이 사용하는 표현은 자극을 좀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극이란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더 가혹하고, 달콤한 자극을 불러일으켜 결국은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나게 하여 버리기 때문에, 주장에는 응당 자극이 아닌 견고한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수저론자들이 원하는 세상은 무엇일까? 기업이 사내유보금을 사회에 환원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더 창출하면 세상은 좀 더 행복해질까? 애초에 양질의 일자리란 무엇일까? 높은 연봉을 받으면 그 인생은 좀 더 행복해질까? 30대 초반엔 어느 정도의 자본을 갖고 있어야 부족하지 않다고 여겨질까? 우리는 끊임없이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저축이나 주식 등을 통해 자본을 늘리려는 행위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돈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소박한 삶은 현실을 모르는 삶으로 치부되고 현대 사회는 오로지 물질적인 풍요만이 행복을 결정한다고 가정해버린 듯하다.

소설 '외투'에서 아까끼는 유령이 되어서야, 다시 말해 비현실적인 순간에서야 자신이 놓인 부당함을 해소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를 배회한다. 수저를 입고 있는 우리는 유령이 되지 않고서도 제 목소리를 낼 정도의 실행력들은 가지고 있다. 그 정도의 실행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저 동물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수준의 공감이 아닌 논리로 무장된 이성적인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물질적 차이에 대한 감성에 치우친 주장으로는 결국 한계를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수저론자들에게 한 마디를 묻고 싶다.

'당신들이 말하는 대로 행동하면, 세상은 더 행복해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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