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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끝나고, 객석을 빠져나오며, 체홉의 '6호 병동'이 떠올랐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예전에 표시해두었던 부분을 펼쳐 다시 읽어봤다.

  "무슨 까닭으로 당신은 나를 여기에다 가뒀소?"
  "당신이 아프기 때문이오."
  "그래, 아프지. 하지만 당신들이 무식하게도 미치광이와 건강한 사람을 구별하지 못해서 수십, 수백 명의 미치광이들이 자기 맘대로 나돌아다니지 않소. 대체 왜 나와 여기 이 불쌍한 사람들만이 속죄양처럼 모든 사람들을 대신해서 여기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거요? 당신, 보조 의사, 사무장, 그리고 당신 병원의 모든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도덕적인 태도 면에서 여기에 있는 우리보다 훨씬 더 나쁜데, 대체 왜 우리는 여기에 갇혀 있고, 당신들은 그렇지 않은 거요? 무슨 논리가 그렇소?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이와 환자인 이반의 대화다. 이반은 안드레이에게 자신을 무슨 이유로 정신병동에 가뒀냐 물어보고, 안드레이는 당신이 아프기 때문이라며 답한다. 이후 내뱉는 이반의 대답은 놀라웠다. '당연한' 것들에 대한 질문과 의문이었다. 이반은 사회에 의해 정신병자로 규정지어지는데, 책을 읽다보면 과연 이반이 비정상적이라 단언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어느 정도의 강박, 심리 불안 같은 가벼운 정신 질환은 누구나 앓고 있는 것이고, 과연 우리가 그것을 '질환'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아하다.

   
 


왜 저들은 세상과 분리되어야만 했는가. 저들의 상태를 '비정상'이라고 규정한 정확한 기준은 무엇이며, 반드시 비정상이 분리되어야 한다고 여겨지게 되었던 통념들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이반의 말대로 정작 분리되어야 할 대상은 도덕과 양심을 팔아먹은, 정신 이상자들을 규정하고 학대하는 저들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과 함께 분노가 일었다. 그때 그 기억이 연극 '에쿠우스'를 보면서 되살아났다.

연극 '에쿠우스'는 17살의 한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비정상에 대한 강력하고 폭력적인 기준과 범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아이를 평범한 가장, 신도, 시민으로 만드는 일이 과연 정상적입니까?"

일곱 마리 말의 눈을 찌른 17살 소년 알런 스트랑. 이 끔찍하고 정상적이지 않은 사건을 벌인 소년 알런은, 우리에게 그저 '정신 이상자'로 분류된다. 다이사트는 그 소년을 치료하기 위해 상담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가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우며 원초적인 인간임을 인지하게 된다. 말을 사랑한 인간, 말을 숭배했던 신도, 말을 두려워했던 소년. 이런 알런의 모습에서 다이사트는 인간 태초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모든 장소와 인간에게는 그들만의 신이 있고 그 신은 '여기'에 있다"라고 말하는 다이사트였다. 소년의 욕망과 본능을 억제하고 강압했던 아버지, 소년에게 광신도의 모습을 보이며 신앙에 대한 강박을 요구했던 어머니. 소년의 욕망은 짓밟혀왔고, 믿기지도 않는 신에 대한 숭배의 행동을 강요받았다. 말(馬)은 불행한 소년의 구원자가 되었고, 그렇게 소년은 말을 사랑하며 숭배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런 소년의 신앙적 대상을 보며, 비정상적인 일이라며 혀를 끌끌 차지만, 다이사트는 신앙적 대상과는 관계없이 신앙이라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며, 그것은 인간 모두가 지향하고 실행하고 있는 행위라 여긴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들만의 신이 있다"고 말이다.

   
 


연극 '에쿠우스'는 앙상블인 말(馬)들의 역동적인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이번 무대 또한 그 명성을 관객들에게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거친 갈기, 가쁜 숨소리, 탄탄하다 못해 견고하기까지 한 미세한 근육 줄기들, 강인한 늑골. 그들이 내뿜는 생명력은 열기를 더해 관객들에게까지 더해지고 있었고, 그들은 인위와 위선으로 점철된 사회를 향해, 자연을 대표하고 있는 한 상징물로까지 보였다. 생기를 빼앗겼던 알런이 생기를 되찾고 생(生)에 대한 애착을 갖게 만든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알런은 '너제트'라는 말과 함께 매일 밤 넓은 들판으로 달려 나갔고, 그의 반짝이는 갈기와 털들을 빗어주며 살아있음을 느끼곤 했다.

   
 


다이사트는 오히려 알런을 동경했다. 생(生)을 향한 열정, 욕망에 대한 뜨거운 분출을 모두 경험해 본 알런을 말이다. 비록 '세상과는 단절된' 소년일지라도, 이 소년의 욕망과 열망은 세상에서는 '정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들이었을지라도, 확실한 것은 그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누릴 수 있는 역동적인 생의 에너지를 여지없이 내뿜어봤지 않은가.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울리는 연극이었다. 시놉시스만을 들었을 때, 소년은 그저 끔찍한 인간, 짐승 같은 인간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연극의 폭발성과 생동성은 그 소년을 태초의 시절에서 거슬러 온 것만 같은 순수하고 무구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들은 꽤나 있다. 그러나 연극 '에쿠우스'가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며 관객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바로 그 의문이 역동적으로 표현되고, 너무나 비극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일 테다.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참고] 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중 「6호 병동」, 열린책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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