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일: 2024.03.12
캐스팅: 전성우, 장민제, 김도빈, 최미소, 김서환, 이정화
장소: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좌석: C구역(우측 블럭) 2열

천둥번개가 치던 밤, 무서운 마음에 몸보다 무거운 이불을 질질 끌며 안방으로 향했던 어린 날을 기억한다. 어리광을 부리며 안방 침대 위에 쏙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어머니께선 늘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동화나 신들의 이야기, 아니면 이 순간에도 지구가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같이 아이들이 눈을 빛낼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별처럼 수많은 꿈을 꾸곤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의 결말을 들은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발끝부터 스며오는 따스한 온기와 포근한 이불의 내음, 다정한 어머니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어느새 깊은 꿈속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세상을 떠도는 이야기에는 어떤 힘이 있다. 우리를 어떤 꿈에라도 데려가 줄 수 있는 그런 특별한 힘 말이다. 

그리스의 아름다운 섬 사모스에는 사랑 속에 자란 두 아이, 다나에와 티모스가 살았다. 작은 주인님 다나에와 노예 티모스는 다른 운명 속에 태어났지만 함께 이야기를 들으며 가까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사고로 두 아이는 얼굴에 상처를 나눠 새기게 된다. 그 이후로 다나에는 흉터를 숨기려 성에 갇혀 살며 유일한 친구인 티모스와 이야기를 만드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다나에는 성 밖에 있는 푸른 바다를 꿈꾸고, 티모스는 다나에와 함께 몰래 성을 빠져나와 바다를 보러 간다. 하지만 이 사실을 들키고 티모스는 다른 곳에 노예로 팔려 가게 되어 다나에와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되는데... 이야기로 연결된 이 둘의 이야기는 어떻게 쓰이게 될까?

뮤지컬 '이솝이야기'의 배경인 사모스섬은 드넓고 푸른 바다 위에 자리 잡은 그리스의 명소이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과는 달리 이곳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꽤나 매섭다. 신분에 따라 철저히 갈라진 아이들과 이들이 만들어낸 꿈같은 이야기를 외면하는 잔인한 현실까지. 환상과 현실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잔혹성에서 느껴지는 씁쓸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둥근 원을 그리듯 우리가 사는 이 땅 위를, 바다 위를 감싸고 돌며 수많은 사람의 귓가에 꿈과 환상을 속삭인다.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어느새 어른이 된 아이들의 현실에 닿은 이야기는 이들의 희망찬 오늘을 환하게 비춘다. 마치 그 어느 날 이들이 뛰쳐나와 보았던 저 바다 위의 별처럼. 

사라지지 않고 세상을 여행하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이솝이야기는 현실과 맞닿아있기에 더욱 생생하다. 이솝우화가 그러하듯 마냥 예쁘고 행복한 동화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내용을 담아내어 교훈을 전한다. 그럼으로써 이솝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책 안에 까만 글자로 구구절절 쓰인 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만들어지는 나의, 너의,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쏟아지는 별 무리의 축복을 받는 해피엔딩이 아니더라도, 마법 같은 환상의 나라는 없을지라도 충분히 아름다운 우리만의 동화 말이다. 이 세계를 떠도는 이솝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 모두의 인생으로 말미암아 완성되는 셈이다. 뮤지컬 '이솝이야기'는 이렇게 달콤씁쓸한 우리네들의 이야기를 따뜻한 목소리로 전한다.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이솝이야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따뜻한 동화
사진 = 강시언 / [리뷰] 뮤지컬 '이솝이야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따뜻한 동화

 

돌고 도는 이야기처럼 둥근 무대는 작품의 정체성을 잘 나타낸다. 동시에 소박하되 알찬 구성을 뽐낸다. 하늘, 바다, 구름, 바람과 같은 자연적인 이미지의 오브제가 무대를 가득 채워 무대 자체가 하나의 세계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배우들의 동선도 원형을 기준으로 짜여져 스토리와 무대 구성 등이 하나로 어우러져 나타나는 전체적인 일치감이 좋았다. 이야기가 노래가 되어 둥글게 극장을 휘감는 듯한 신비한 느낌이 기분좋게 다가왔다.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의 독특한 무대 형태를 가장 잘 활용한 작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많은 주요 장면이 무대의 중심, 정면 위주로 펼쳐지는 경향이 강하여 사이드 블럭 끝 쪽 좌석의 경우 관람 시 약간 답답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다. 

배우들의 통통 튀는 연기도 극에 매력을 더한다. 전성우, 장민제 배우가 가진 따뜻한 분위기와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화롭게 맞물려 사랑스러운 합을 만들고, 김도빈 배우의 재 치있는 연기가 감칠맛을 톡톡히 끌어올린다. 최미소, 김서환, 이정화 배우의 바람같이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무대를 꽉 채우는 아름다움 화음도 인상적이었다. 따스한 이야기와 넘버, 배우들의 뛰어난 소화력이 합쳐져 초연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퀄리티의 작품을 완성해 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빛나는 꿈의 궁전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보다 소박한 오두막에 걸터앉아 나란히 올려다본 밤하늘의 별들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우리가 사는 이야기들은 꼭 그 은은한 별빛과 닮아있다. 작은 빛줄기로도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별처럼 우리의 이야기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며 끝없이 이어진다. 그렇게 모인 작은 빛들이 결국 우리가 갈 길을 비추는 밝은 등대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이솝들이여, 부디 이야기를 멈추지 말기를. 세상에 빛을 전하는 일을 계속하기를. 뮤지컬 '이솝이야기'에서 말하는 '진심을 전하는 이야기'가 수많은 시간을, 세기를, 시대를 건너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바래본다. 한편, 뮤지컬 '이솝이야기'는 오는 4월 14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된다. 

문화뉴스 / 강시언 kssun08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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