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거창한 각오는 아니다. 극발전소 301 단원과 함께 즐겁고 오래오래 연극을 하고 싶다. 그게 어떻게 보면 소박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연극에 푹 빠진 무역학 전공자는 서울예대에 들어가 제대로 연극을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2006년 '로미오와 줄리엣은 살해당했다'로 옥랑희곡상에 등단한 후, 자신의 선·후배 및 동료와 함께 극발전소 301 극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2009년 AYAF 차세대 예술인력 집중육성지원 1기 선정, 2011년 차세대 희곡작가 인큐베이팅 선정 등 차세대 연극인으로 입지를 굳히게 됐다.
 
그리고 2014년 '만리향'으로 제34회 서울연극제 신인연기상, 희곡상, 연출상, 대상을, 이듬해인 2015년엔 제35회 서울연극제 '돌아온다'로 연출상, 우수상을 받았다. 또한, 그해 열린 2인극 페스티벌에선 '영웅의 역사'로 작품상을 받았다. 조금씩 성장하는 '청년 연극인' 정범철 연출의 이야기다.
 
최근 '액션스타 이성용' 오픈런 공연 작·연출과 더불어 23일 '불후의 명곡' 페스티벌에서 스승 오태석 작가의 '여자가' 낭독공연을 준비 중인 극발전소 301의 정범철 대표를 만났다. 정범철 연출에게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자신의 연극 이야기를 쭉 들어봤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청년 연극인'이 꿈꾸는 소박한 삶과 더불어 연극에 대한 사랑을 느껴보자. 먼저 영상 인사말을 살펴본다.

 
무역학을 전공하다 연극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ㄴ 처음엔 배우가 되고 싶어, 연극을 하고 싶었다. 배우가 되고 싶었으나, 부모의 반대로 연극영화과를 가지 못했다. 내가 95학번인데, 당시엔 연극영화과가 많지 않았다.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로 "점수를 맞춰서 대학에 가라. 그 후엔 안 말리겠다"고 해서 경기대학교에 가게 됐다. 입학식 날에 연극동아리가 어디 있나 물어보고 찾아가 가입을 해서 연극을 시작했다. 배우를 하다가 배우보다 나는 연출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배우를 안 하게 됐고, 지금까지 작·연출로 활동하고 있다.
 
졸업 후 서울예대를 가게 된 이유는?
ㄴ 연극동아리에서 나는 전공보다 더 열심히 먹고 자고 해서 졸업했다. 연극동아리가 너무 좋았다. 졸업하지 않으면 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계속 작품도 쓰고, 연출도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졸업하고 나서 결심을 했다. '평생 연극을 하고 싶고, 제대로 배워야겠다'라고 생각해서 서울예대에 입학하게 됐다.
 
서울예대 재학 당시 오태석 연출, 이강백 작가의 수업을 들었다. 어떤 내용이었나?
ㄴ 서울예대 다녔을 때, 스승님이 많이 계신다. 오태석 선생님과 이강백 선생님께 큰 가르침을 얻었다. 당시 오태석 선생님이 연출 하시는 것을 어깨너머 배웠는데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게 연출이구나,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라는 가르침을 얻었다. 작가적 면에서 이강백 선생님께 극작가의 자세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수업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면?
ㄴ 많이 있는데, 오태석 선생님이 "연극을 하는 사람인 배우, 작가, 연출은 모두 다 레미콘처럼 끊임없이 돌아야 한다. 레미콘이 시멘트가 굳지 말라고 도는데, 그렇지 않으면 멈추고 굳어버린다. 레미콘처럼 꾸준하게 돌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서울예대 졸업 후 바로 극단 일을 하지 못했다. 국어 강사도 했고, 다큐멘터리 관련 일도 했다고 들었다.
ㄴ 학자금 대출을 갚으려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거나 풍족한 집안이 아니므로, 27살에 다른 대학에 가면서 부모님께 "등록금은 제 손으로 해결하겠다"고 했다.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잡지사도 다녔고, 다큐멘터리 프로덕션에도 있었다. 예술의전당 기획팀으로도 1년 정도 활동했다. 국어 강사로도 잠깐 있었다. 그 시기가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인데, 등단하기 위해 졸업하면서 글도 계속 쓰면서, 빚을 갚아야 해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돌아보면 힘든 시기였다.
 
그래도 2006년 '로미오와 줄리엣은 살해당했다'로 옥랑희곡상을 수상했다.
ㄴ 일을 병행하면서 글을 쓰다 보니, 신춘문예도 떨어지고, 희곡공모도 떨어지고, 잘 안됐다. 여유가 없었다. 아르바이트 일을 하다가 안 되겠다 싶었다.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생각해,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1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글만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32살이었는데, 이별도 했고, 백수처럼 집에서 츄리닝만 입고, 밥 먹고, 잠만 잤다. 6개월이 지나 경제적인 아무것도 없어서, 정신 차리고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다.
 
뭐라도 해야겠다 하려던 차에 이강백 선생님에게 연락이 와서, 서울예대 조교 제안을 해주셨다. 그래서 백수 탈출을 했다. 백수 때 쓴 단막극 몇 개랑 장막극 하나가 있는데, 그게 '로미오와 줄리엣은 살해당했다'였다. 바닥까지 갔다고 생각했는데, 옥랑희곡상으로 등단하게 됐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살해당했다'는 어떤 작품인가?
ㄴ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고전인데, 그걸 틀어봤다.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이 아니라, 소재를 따와서 새로 쓴 거다. 생각을 바꿔봤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로미오'와 '줄리엣'이 주인공인데, 고전 작품엔 초반부에 '로잘라인'이 등장한다. '로미오'가 '로잘라인'에게 차여서 '줄리엣'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에 '줄리엣'에게 청혼한 '패리스'가 있는데, 이 작품에선 '로잘라인'과 '패리스'가 주인공이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조연이다. 중심 사건은 유지하되, 사랑에 실패한 소외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 지난해 11월, 정범철 연출이 '영웅의 역사' 연습을 지켜보고 있다. ⓒ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등단 후 다른 극단을 들어간 것이 아니라, 직접 극단 극발전소 301을 2008년에 차리게 됐다. 그 이유는?
ㄴ 작가로 먼저 등단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극단에 들어갈까 말까 고민한 시점은 서울예대에 지원할 때였다. 대학에 또 들어가는 게 맞을까, 현장 극단에 가서 활동하는 게 맞겠느냐고 고민하다가 작가 연출을 위해서 글을 배워야 하니, 학교에 다시 들어가게 됐다. 30이 넘어서 졸업할 때, 극단을 들어가기엔 시간이 늦은 것 같았고, 작가 등단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작가로 활동하다가 현장 인맥도 생기고, 어떻게 해야 더 잘할 것인가 파악하면서 극단을 여유 있게 만들려 했다. 그래서 작가도, 연출도, 배우도 서울예대 선후배나 지인들과 함께해, 우리가 젊은 극단을 만들어서 부딪쳐보자고 했다. 고민 끝에 달걀에 바위를 치더라도 얻는 것이 값진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동기인 황이선 연출을 비롯한 사람들과 2008년 극발전소 301로 시작하게 됐다.
 
극단을 만들고 초기 운영은 어땠나?
ㄴ 초반은 어려웠다. 신생 극단은 다들 힘들었다. 이 극단이 어떤 극단인지 아는 사람도 없고, 얘네가 어떻게 하는 극단인지도 모르니 지원금을 신청해도 될 리가 없었다. 제작비를 마련해야 하니 선후배 4명이 400만원 씩 걷었다. 돈이 합쳐서 1,600만원 되는데 한 달 대학로 소극장을 대관할 수 있겠다 싶어서 공연했다. 여기에 조교로 일하면서 나중에 퇴직금도 받으니 천만원 정도 되어서, 그때 받은 걸로 한 것이 '병신3단로봇'이었다. 빚도 지기도 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공연했다. 그래도 계속하니 잘 된 거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극단이 이제 8년째 됐는데, 새로 극단을 만들려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작게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제작비 300만원은 아르바이트를 좀 하면 만질 수 있으니, 300만원으로 4~5일 공연 하면서 경험도 쌓고, 부담 없이 극단을 알리는 시간을 2~3년 정도 가지면 나름의 노하우와 요령도 생긴다. 그러면 지원금 받을 확률도 늘어날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 무리하게 한 것이었다. 전체제작비를 3~400만원으로 하면, 공연을 날려도 배우들이나 스태프에게 줄 돈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9 AYAF 차세대 예술인력 집중육성지원 1기 선정, 2011 차세대 희곡작가 인큐베이팅 선정 등 차세대 연극인으로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ㄴ 매년 계속해서 공연하기 때문인 것 같다. 4~5편 작품을 포함해 같이 영차영차 해서 열심히 했다. 그러다 보면 운이 따라주고, 지켜봐 주신 기회를 한두 번 정도 올 때 놓치지 않고 잡으려 했다. 그 기회가 이어가게 된 것 같다.
 
2014년 '만리향'과 2015년 '돌아온다'로 서울연극제에서 2년 연속으로 '대박'을 냈다.
ㄴ 운이 좋은 것 같다. 예상도 못 했다. 2014년 '만리향'이 서울연극제 본선에 나가는 것이 확정될 때만 해도, "우와 내가 본선에 진출하다니"라고 생각해 본선에 오른 것만 해도 기뻤다. 수상은 크게 기대 안 했다. 처음 본선에서 나가서 공연했기 때문에, 정말 큰 행운이었다. 대상, 연출상, 희곡상, 신인연기상을 모두 받았다.
 
다음 해 극단 필통 제작으로 연출로 참여해 서울연극제에 참가했는데, 그때도 기대를 안 했다. 상을 받으려고 연극을 하는 게 아니고, 즐거움이 있어서 하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우수상과 연출상을 받았는데, 또 상을 받게 되어 어리둥절했다. 많은 선배 극단과 함께 하는데 상을 받으니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몰랐다.

여기에 지난해 '2인극 페스티벌'에 '영웅의 역사'를 발표해 작품상과 연기상을 받았다. 다시 레퍼토리로 올릴 계획이 있는가?
ㄴ지난해 '2인극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신은수 작가가 쓰고 리우진, 박정권 배우가 연기해 작품상과 연기상을 받았다. 안 그래도 올해 계획이 잡혔다. 예술공간 서울에서 8월에 올릴 예정이다. 신은수 작가가 역사극을 주로 쓰는 작가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내용 오류를 지적한 일본인 변호사가 한국에 와서 안기부 요원과 만난다는 이야기다. 뭔가 의미가 있고,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 유쾌하게 지금 관객도 즐길 수 있도록 풀어냈다. 당시 2일밖에 하지 못했다. 더 많은 관객이 볼 기회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아무 지원금 없이 자체제작으로 공연하게 됐다.
 
   
▲ '제15회 2인극 페스티벌' 작품상 수상작 '영웅의 역사'의 (왼쪽부터) 정범철 연출, 리우진 배우(연기상), 신은수 작가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지난 12일 막을 내린 '만리향'이나 오픈런 공연 중인 '액션스타 이성용'은 모두 가족이 강조되는 작품인데, 본인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인지 듣고 싶다.
ㄴ 가족은 내 삶의 시작이자 마지막 울타리 같은 느낌이다. '만리향' 같은 경우는 김원 작가가 쓴 작품인데 그걸 연출한 작품이고, '액션스타 이성용' 같은 경우는  이 시대 방황하는 청춘들의 성장 드라마를 쓴 것이다. 이 작품도 아버지라는 요소를 끌어오면서 가족 이야기가 됐다. 가족 이야기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여러 소재가 있는데, 우연히 가족 이야기가 자주 된 것이다. 나는 다양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가족 이야기는 따뜻하게 풀어야 한다. 너무 슬프거나 비극적으로 가슴 아프게 푸는 것보다, 따뜻하고 잔잔하며 아름답게 풀고 싶다. 가족사가 굴곡 있지 않고 평탄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액션스타 이성용'은 오픈런 작품인데, 처음부터 오픈런을 염두에 뒀는가?
ㄴ 지난해 11월 초연 당시, 오픈런을 계획하진 않았다. 기획사가 작·연출을 의뢰했는데, 4개월만 뚜껑 열어보고 괜찮으면 오픈런까지 생각해보자였다. 지난해 11월부터 2월까지 작품을 했는데, "오픈런 가봅시다"가 됐다. 제작사의 목적이 뚜렷했다. 이 작품으로 길게 가고 싶으니, 길게 가려면 대중적 요소를 넣을 수밖에 없었다. 즐겁고 재밌어야 하는 지점을 신경 안 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만 하고, 단순한 작품으로 남기엔 작·연출 입장에서 싫었다. 젊은 관객이 많다. 저 연극에 등장하는 '이성용' 인물처럼 목표 없이 살다가 성장하는 것을 보며, 나도 한 번 그런 목표로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으로 나선다면 그 연극은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며 극을 썼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노출도 등장한다.
ㄴ 액션 연습을 많이 했다. 그래서 몸 관리도 열심히 했다. 액션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옷이 벗겨지면서, 살짝 노출이 있기도 하다. 아예 상체 노출이 이뤄지는 남자 배우도 등장한다. 대중이 좋아할 수 있는 장면을 넣은 것이다. 배우의 매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몸을 열심히 관리했는데 꽁꽁 옷 속에 가두긴 싫었다. 사실 그 정도 노출은 노출도 아니다.
 
   
▲ 연극 '액션스타 이성용'의 한 장면.
 
대학로에 너무 상업적이 연극이 많아졌다는 우려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ㄴ 좋은 작품, 좋은 연극을 만드는 것이라면 괜찮다. 수준 있고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게 목적이지, 그게 너무 예술적으로 치우치거나, 상업적으로 치우쳐져 있다는 것은 두 번째 문제가 된다. 상업적이어도 좋은 작품이 있는데, 그것만으로 작품이 상업이냐 아니냐 기준으로 따지는 것도 옳지 않다. 예술적으로 좋고 훌륭한 작품도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완성도 있고 수준 있는 연극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글을 쓸 때, 작품의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오는가?
ㄴ 소재는 사방팔방에서 다 온다. 사람들이랑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순간 떠오를 때도 있다. 책을 읽거나,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나, 산책할 때도 떠오르기도 한다. 삶 속에 소재는 다 있다. 하지만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기록하지 않으면 까먹는다.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바로 기록한다. 한 단어 한 문장이라도 기록해서 내 컴퓨터에 저장하는데, '소재의 창고'라는 폴더에 넣는다. 바로 지금이 아니더라도 어느 시점이나 훗날 그 이야기를 꼭 써먹을 수 있게 된다. 그 작업이 극의 시작이니. 굉장히 중요하다.
 
최근 몇몇 극단이 원작가에게 고료를 지급하지 않은 문제가 화두에 올랐다. 
ㄴ 오세혁 작가가 지난번에 한 이야기와 같은 의견이다. 그러면 안 된다. 많이 바뀌고 있는데, 인식이 바뀌지 않은 옛 분들이 종종 계시는데 잘못됐다. 정당하고 떳떳하게 작가료를 지급한 만큼 당당하게 홍보하고, 공연했으면 좋겠다. 그런 길을 택하지 않고, 조금의 돈을 아끼려고 공연을 올리면 장기적으로 극단의 이미지는 안 좋아진다. 좀 더 멀리 봤으면 좋겠다.
 
나도 제작을 하지만, '만리향'의 김원 작가에게 항상 공연할 때마다 이야기해서 서로 합의된 금액을 주게 된다. 이러한 인터넷과 SNS 세상에 그걸 어떻게 숨기겠는가? 말도 안 된다. 각성하고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나도 한국희곡작가협회에 소속되어 있으니 노력을 하고 있다. 한 번 인식을 바꾸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차츰 변화나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 연극 '만리향'의 한 장면.
 
 
다양한 기회를 통해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작업한다. 원동력은 무엇이며, 극발전소 301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ㄴ 극단 대표를 하고 있으니 극단 작업이 아무래도 중요하다. 그리고 나 혼자가 아니라 단원들도 있으니, 극단에서 작업하지 않으면 단원도 없다. (극단 배우는 몇 명인가?) 현재 신입 들어와서 31명인데, 단원들이 외부 작업도 정단원만 되면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극단 작업이 많아야 소속감도 유지할 수 있고, 무대에 설 기회도 많아진다. 극단이 유지될 수 있고, 돌아갈 수 있게 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굉장히 그게 중하다. 나는 나대로 연극 제작비를 구하는 게 한계가 있다. 먹고 살릴 처자식도 있으니, 외부 작업을 통해 작가나 연출로 의뢰를 받고 일을 병행하고 있다.
 
본인이 각색한 '메밀꽃 필 무렵'이 최근 강원도에서 공연 중이다. 어떤 작품인가?
ㄴ 강원도립극단에서 이효석 소설가의 '메밀꽃 필 무렵'을 마당극으로 바꿔서 올해 제작을 했다. 16일 강원도 횡성에서 첫 공연을 올렸는데, 극본을 다시 썼다. 윤정환 연출이 했는데, 올해 동해, 철원, 양구 등 강원도 10개 시·군에서 공연한다.
 
23일 오태석 작가의 '여자가'를 '불후의 명곡' 페스티벌을 통해 연출하게 됐다.
ㄴ '불후의 명곡' 참가가 결정되고, 오태석 선생님의 작품을 바로 하기로 했다. 스승님이시니, 스승님의 작품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선생님 작품을 많이 보고 읽었는데, 고르려다 보니 선생님이 연출을 많이 하셔서 함부로 대본만 갖고 공연하는 것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선생님이 자주 올리신 '태' 등을 피하게 됐다. (이번에 공연된 '태'는 보았는가?) 이번엔 보지 못했고, 옛날 공연을 봤었다. 그러다 '여자가'라는 작품이 확 들어왔다. 작품이 너무 매력적인데 왜 안 올리실까 생각했다. 2016년에 올려도 매력적일 거로 생각해, 낭독공연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 연극 '만리향' 출연진과 정범철 연출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앞으로 목표는 무엇인가?
ㄴ 거창한 각오는 아니다. 극발전소 301 단원과 함께 오래오래 연극을 하고 싶다. 그게 어떻게 보면 소박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즐겁고 길게 극단과 함께, 단원과 함께, 그리고 앞으로 만날 배우, 스태프 분들과 함께 좋은 연극을 만들기 위해 쭉 하고 싶다.
 
아이가 연극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겠나?
ㄴ 아이가 태어나니 질문이 많이 들어온다. 아들에게 네가 아무 생각 없이, 알지도 못하고 하려고 하는 것인지, 연극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인지 물어볼 것 같다. 호기심에 하는 것보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환상만 갖고 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할 힘과 끈기도 있어야 한다. 알고 하겠다면 그때는 말리지 않을 생각이다.
 
문화뉴스와 인터뷰했다. 정범철 연출에게 문화란?
ㄴ 연극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숨 쉬는 것과 같다고 했다. 숨을 못 쉬면 죽듯이, 연극을 못하면 죽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 기억이 있다. 연극보다 문화는 더 크다. 문화는 존재인 것 같다. 문화가 있으니까 무엇이든 존재한다. 생명체든, 지구든, 우주든 문화가 없으면 존재할 수 있을까? 문화가 정책 쪽으로 잘됐으면 좋겠다.
 
[글]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사진·영상] 문화뉴스 서정준 기자 some@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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