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숙이 '안드로마케'를 맡아 한 장면을 선보이고 있다.

[문화뉴스] "이 작품은 무엇보다 여인들의 이야기다.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여인들이 겪은 전쟁 이야기를 많이 가진 한국에서 특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에우리피데스가 '트로이 전쟁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집필해, 기원전 415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발표한 희곡 '트로이의 여인들'이 창극으로 옮겨진다. '트로이의 여인들'이 11일부터 20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린다.
 
이번 작품의 연출은 세계적인 연출가이자 싱가포르예술축제 예술감독인 옹켕센이다. 그는 프랑스 테아트르 드 라 빌,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 미국 링컨센터 페스티벌 등 세계 주요 공연장과 축제에서 러브콜을 받아왔다. 동서양의 다양한 전통예술을 조화롭게 무대에 올리는 한편, 원작 본연의 주제를 탁월한 미장센으로 완성하는 연출가로 인정받았다.
 
'트로이의 여인들'을 통해 처음으로 창극에 도전하는 옹켕센이 내세운 콘셉트는 '미니멀리즘'이다.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 및 문화 사조로,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최소한의 요소만을 사용해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는 콘셉트다. 이는 판소리 본연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려는 선택이다. 음악적으로는 불필요한 요소들을 걷어내고 판소리의 정통기법에 집중하며, 무대 미술 역시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게 꾸며졌다.
 
   
▲ 김준수(오른쪽)가 '헬레네'를 맡았다.
 
작품의 극본을 맡은 배삼식 작가는 에우리피데스 '트로이의 여인들'과 장 폴 사르트르가 개작한 동명의 1965년 작품을 바탕으로 창극을 위한 극본을 다시 썼다. 이 작품에선 전쟁은 배경일 뿐이다. 그리스와 스파르타 연합군과의 십 년 전쟁에서 진 트로이의 모든 여인이 왕비였던 '헤큐바'를 비롯해 승전국 그리스로 노예로 끌려가기 전 몇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담았다. 전쟁의 야만성과 비극은 남아있지만, 이야기는 가장 마지막 순간에 남은 사람들이 지닌 '내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라는 절박한 감정에 주목한다.
 
이번 공연에선 '헤큐바', '카산드라', '안드로마케', '헬레네'로 대표되는 네 명의 여인들이 벼랑 끝에서 선택하는 각기 다른 감정과 삶의 방식은 더 선명해졌다. 왕가의 여인들과 대비되는 코러스의 존재도 주목받는다. 코러스들은 세상의 보통 여자들을 상징하며 트로이 왕가의 여인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전쟁과 국가에 대해 노래한다.
 
작창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판소리의 거장 안숙선 명창이, 작곡 및 음악감독은 뛰어난 음악성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 중인 정재일이 맡았다. 정재일은 소리꾼과 고수가 함께 판을 이끌어가는 판소리의 형식을 십분 살려, 배역별로 지정된 악기가 소리꾼과 짝을 이뤄 극의 서사를 이끌도록 했다.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 '헤큐바'의 장엄한 목소리는 거문고가,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트로이 공주 카산드라의 목소리는 대금이 맡는 등 배역별 목소리와 악기의 특징적인 소리가 연결됐다.
 
9일 오후 첫 공연을 앞두고 프레스콜이 진행됐다. 주요 장면 시연 후 옹켕센 연출, 정재일 음악감독을 비롯해 '헤큐바' 역의 김금미, '안드로마케' 역의 김지숙, '카산드라' 역의 이소연, '헬레네' 역의 김준수가 로비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 참석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작품을 미리 살펴본다.
 
   
▲ 옹켕센 연출이 프레스콜 전에 시연 장면 소개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 첫 공연을 펼치는 소감은?
ㄴ 옹켕센 : 창극은 전 세계 음악 장르 중 가장 힘이 있는 장르라 인상이 깊었다. 그리고 그러한 창극으로 연출하는 것은 모든 창작자의 꿈이기도 하다.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가져오는 것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배운 것도 많다. 관객분들에게 흥미로운 작품이 될 것이다.
 
공연 무대를 설명해달라.
ㄴ 옹켕센 : 오늘날에 한 국가를 떠나는 장소가 어디냐고 생각했다. 과거엔 배를 타고 떠났다. 작품이 올려지는 배경은 사막에서 배를 타고 떠나는데, 우리 배경은 오늘날의 공항과 비슷하다. 대부분 여행자가 한 나라의 궁전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이 공항이다. 그리고 비행기가 우주선으로 옮겨질 것 같고, 미래와 현재의 어딘가에 있는 독특한 시간대라 봤다.
 
여기에 코러스 분들의 움직임이 많아서 공간을 깨끗하게 하려 했다. 중앙엔 흰색의 파빌리온이 있다. 그 공간은 부유층이 가게 되는 공항 라운지와 비슷하다. 하늘, 우주를 향해 열려 있는 큰 창도 보실 수 있다. 여기에 악사분들이 앉아 있는 곳에선 전통적인 음악회의 느낌도 난다. 서구적이기보단 동양 음악의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연극과 창극의 결합을 어떻게 하려 했는가?
ㄴ 옹켕센 : 그리스극과 창극의 결합을 '미니멀리즘'으로 했다. 창극은 기본적인 판소리 형태에 다가가려 했다. 그래서 한 청자의 목소리와 악기의 음악이 들리는 요소가 있다. 판소리 소리꾼의 노래를 들어보시면 감정이 굉장히 풍부하다. 서구 음악과 비교도 할 수 있다.
 
그리스 연극에서도 마찬가지로 날것의 감정이 등장하고, 극단적인 부분이 많다. 특히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창극과 그리스 연극을 맺어주는 연결고리라고 봤다. 다양한 인물들이 TV 드라마나 연극에 나오는데, 이 작품에선 캐릭터라기보단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스토리 텔러'의 역할을 한다. 어떤 면에선 판소리 본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 정재일 음악감독(왼쪽)과 옹켕센 연출(오른쪽)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네 명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특징을 말해 달라.
ㄴ 옹켕센 : 네 명의 여인은 감정의 다양한 측면을 상징한다. '헤큐바'는 작품 전체에 등장해서 가장 강한 인물이라고 볼 수있다. 전체 공연을 이끌어가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왕이 죽은 상태에서 왕비로 강인함을 지닌 캐릭터다. '카산드라'는 추방당할 예정의 인물인데, 처녀의 열정과 뜨거움을 상징한다. '안드로마케'는 어린 자식과 이별해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좀 더 강조된다. '헬레네'는 이 모든 영역 사이에 있는 존재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여성도 남성도 아닌, 제3의 성이라는 복합적 역할에 있다.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모든 캐릭터가 저마다의 뜨거움을 가지고 있고, 이 작품은 무엇보다 여인들의 이야기다.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여인들이 겪은 전쟁 이야기를 많이 가진 한국에서 특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여성으로 이 예술 형식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계신 안숙선 선생께서 작창하신 것도 의미가 있다.
 
음악감독을 맡았다. 어떻게 작품을 진행하려 했나?
ㄴ 정재일 : 서양음악을 주로 작곡하면서 이 작품에 참여했다. 항상 전통예술에 접근할 때, 서양식 작곡의 접근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노트를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연출가님의 콘셉트와 안숙선 선생님이 만드신 전통적인 선율의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하는 조율사 혹은 어시스턴트라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됐다.
 
그리스 극이다 보니 중간에 코러스의 존재가 있다. 코러스가 네 여인의 이야기를 중간에서 이어줄 수 있다. 현대적이지만, 전통적인 선율로 다리를 만들어준다. 전통적인 소리에 슬픔이나 감정들을 더 증폭시킬 수 있는 음악적 효과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안숙선 작창 선생님의 원곡에 있다.
 
   
▲ 정재일 음악감독은 '파리스'로도 극에 출연한다.
 
직접 '파리스'로 출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ㄴ 정재일 : 김준수 씨와 연출 이야기를 했다. 여장남자도 아닌 '헬레네'가 이 극에서 어떤 캐릭터인지 토론하다가 나온 악기는 가야금이었다. 가야금이 유일하게 화성을 낼 수 있는 개량 국악기다.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그리스인도 트로이인도 아닌 초월적 존재로, 아름다운 존재를 가야금으로 표현해 볼 수 있을까 해서 준비를 하다가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피아노를 넣게 됐다. 피아노를 서양풍이 아닌 한국의 시김새로 준수 씨의 선율을 따라가고자 했다. 네 여인 중 내가 작곡한 선율을 부르게 되는데, 이것을 복합적으로 하려면 내가 출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파리스'를 연기하게 됐다.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의 결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ㄴ 정재일 : 안숙선 선생님의 존재 자체가 판소리인데, 이처럼 올곧게 전통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다. 또한, 퓨전을 해야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둘 다 필요하다고 본다. 지금은 퓨전이라고 하는 것에서 부족함이 많다. 일단 서양음악과 전통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친하지 않고, 서로 배우려 하질 않는다. 해보자는 학습이 많이 이뤄지지 않는다. 말했다시피 서양식 작곡에 전통음악이 들어가면 뭔가 어색해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서양음악을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판을 깔고, 연주자 배치를 하고, 민속, 무속, 궁중음악의 틀만 갖춰놓고 이들을 연결한 후, 이들이 알아서 이뤄지는 게 전통음악을 새롭게 갈 수 있다. 전통을 지키는 것과 다르게 새롭게 만드는 방법이라 봤다.
 
이번에 창극을 처음 하자고 했을 때, 내가 뭘 하지라고 했다. 연출님의 비전은 판소리가 기본인데, 시김새와 이면의 느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오케스트라나 시나위가 들어가면 시김새를 못 느낄 것 같아 최소한의 편곡만 하자고 해서, 판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매우 기뻤다. 심지어 고수가 없는 파트도 있다. 이러한 것이 적나라하게 표현될 수 있어서, 관객분들이 여기에서 감동 느낄 수 있다고 본다.
 
   
▲ '헤큐바'를 맡은 김금미(왼쪽)와 '카산드라'를 맡은 이소연(오른쪽)이 한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어떤 장면이 가장 인상적인가? 그리고 배역별로 지정된 악기가 있는데, 소개해 달라.
ㄴ 이소연 : 나오는 모든 장면이 좋다. 등장부터 퇴장하는 순간까지, 그리고 절정에 치닫는 그 순간을 주목하시면 좋겠다. 전쟁을 펼치면서 다양한 감정을 함께 봐주시면 좋겠다. '카산드라'가 안에 있는 불을 이야기하는데, 대금의 소리와 비슷하다. 불같은 숨을 쉬어야 소리가 나오는데, 성질이 맞닿은 것 같다.
 
김금미 : 역시 그리스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끝까지 버티고자 하는 의지로 부르는 엔딩곡이 가장 인상 깊다. 거문고 소리가 중저음이고, 듬직한 악기이다 보니 연출자가 거문고를 선택한 것 같다.
 
김지숙 : 그리스군에게 아이를 빼앗아갈 때, 주기는 싫으나 어쩔 수 없이 빼앗기는 장면이 있다. 그 아픔을 표현할 때가 가장 인상 깊다. 아이를 잃은 슬픈 표정을 보여주는 악기로 아쟁을 설정했다. 슬픔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악기여서, 음악감독님이 아쟁을 '안드로마케'의 악기로 설정한 것 같다.
 
김준수 : 중성적인 매력을 이번 무대에서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여성스럽지도 않고, 남성답지도 않은 중간 정도의 느낌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보이스톤이 원래 소리꾼의 목소리대로 고음이지만, 내적으로 튕기는 모습으로 여성미를 표현하려 했다. 이쪽저쪽에 속할 수 없어서, 전통악기와 차별성을 두기 위해 피아노를 선택하신 것 같다. 여기 계신 분들과는 차별화된 것 같다.
 
[글]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사진]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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