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Hermès'의 시작과 지금, , 창립자 '티에리 에르메스(Thierry Hermes)'
에르메스 가방, 스카프, 지갑, 신발, 팔찌, 향수
1837년에 창립하여 6대째 내려오는 프랑스의 가족 경영 럭셔리 브랜드

사진출처=에르메스 홈페이지

 

[문화뉴스 MHN 윤승한 기자] 에르메스(Hermès)는 가방, 의류, 스카프, 신발, 시계 향수 등을 제작하는 프랑스의 럭셔리 브랜드이다.

 

 

티에리 에르메스(Thierry Hermes)

 

'에르메스(Hermès)'의 시작

티에리 에르메스는 크레펠드 지역에서 프랑스인인 아버지와 독일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크레펠드는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린넨(Linen), 견직물 산업 등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는 프랑스 파리의 마들렌 광장의 바스 듀 롬프르 56번가에서 안장과 마구용품 등을 생산했다. 당시 이 곳은 2년 전 공화당원이 루이 필리프 왕의 행렬을 공격하여 20여 명의 사상자가 생긴 사고로 임대료가 현저히 낮아진 상태였다.

자금 사정이 여유롭지 않았던 티에리 에르메스는 이를 이용하여 첫 사업을 시작했고 이렇게 에르메스 브랜드가 시작되었다.

 

 

1880년에 연 파리의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 에르메스 매장

 

샤를 에밀 에르메스와 사업 영역의 확장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에 의해 설립된 에르메스는 품질에 대한 헌신, 청렴함으로 인해 빠른 시간 안에 유명해질 수 있었다. 1867년, 세계 각국의 새로운 공산품을 소개하는 축제형태의 산업 박람회였던 만국박람회가 파리에서 열렸는데 티에리 에르메스는 이 만국박람회에 자신이 생산하는 마구 제품을 가지고 참가하여 1등상을 수상하며 에르메스 마구의 우수한 품질과 견고함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1831년에 태어난 아들 샤를 에밀 에르메스는 1859년부터 아버지를 도와 에르메스의 사업에 합류했다.

1878년 티에리 에르메스가 세상을 뜨고 아버지를 이어 샤를 에밀 에르메스는 가업을 계승했고,  아버지가 탔던 만국박람회 1등상을 다시 한번 수상했다.

샤를 에밀 에르메스는 1880년, 프랑스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 인근에 위치한 파리의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에 마구를 취급하는 새로운 매장을 열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현재 에르메스 본사와 플래그십 스토어가 존재하는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는 당시 부유한 고객들이 접하기 쉬운 장소였다.

 

 

에르메스 박물관

 

에르메스 형제의 3세대 경영과 에르메스 사륜마차 로고의 탄생

1902년, 샤를 에밀 에르메스의 두 아들인 아돌프 에르메스와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가 합류하여, 에르메스는 ‘에르메스 형제’라는 이름으로 3세대 경영에 들어갔다.

1918년, 에르메스의 단독 대표가 된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는 전쟁 이후 미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에르메스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그는 미국에서 발견한 지퍼에 대한 프랑스 내 전매권을 획득하여 가죽 제품과 패션 제품에 과감하게 사용했다. 또한 마구상으로 시작하며 획득한 기술인 에르메스의 ‘새들 스티치(Saddle Stitch)’ 기술을 핸드백과 여행 가방에도 적용하여 고급스러운 가죽 제품을 만들었고, 사람들의 다양해진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하여 여행, 스포츠, 자동차용품, 의류, 실크 스카프, 벨트, 장갑, 보석, 팔찌, 시계에 이르기까지 제품 영역을 다양하게 확장시켰다.

한편 1924년에는 미국에 진출했다. 1929년에는 에르메스의 여성복 라인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1937년은 에르메스 창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는 에르메스의 헤리티지인 말과 관계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큰 관심을 보이며 점심시간이 되면 드루 경매장을 방문하여 눈에 띄는 물건을 수집하곤 했다. 그렇게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가 수집해온 그림, 서적, 예술품 컬렉션은 그가 사용하는 사무실에 모아져 1937년 에르메스 박물관으로 개관되었고 현재까지도 이 박물관은 유지되고 있다. 많은 에르메스의 디자이너들은 이 곳의 물품을 관람하면서 영감을 받아 스카프의 패턴 등 에르메스의 아이템을 디자인하기도 했다.

 

 

에르메스 로고의 원본이 된 프랑스의 화가 알프레드 드 드로의 19세기 석판화

 

1945년, 에르메스는 에르메스의 로고인 사륜 마차 ‘깔레쉬’를 법률적 효력을 가진 상표로 등록했는데, 이 로고 역시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가 수집한 프랑스의 화가 알프레드 드 드로의 19세기 석판화 '르 뒤끄 아뗄'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그림 속에는 당시 귀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뒤끄’라는 고급 마차가 마부 석이 빈 채로 묘사되어 있었는데, 이 그림을 활용한 에르메스의 로고는 에르메스가 고삐를 조정할 고객을 기다리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새들 스티치/사진출처=에르메스

 

새들 스티치

에르메스 가죽 제품에서 가장 중요한 디테일은 스티치, 즉 박음질이다. 이는 에르메스 역사의 시작인 마구 및 안장을 만드는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안장에 쓰는 전통 수공 박음질 기술인 새들 스티치와 함께 가죽의 절개된 단면을 광택 처리하는 기술은 에르메스 가죽 제품에 쓰이는 수많은 작업의 일부인 한편 에르메스를 특별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기도 하다.

새들 스티치는 특정 도구를 가지고 수개월의 훈련을 거친 전문가의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며, 엄격한 품질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샹 당크르 더블 링

 

샹 당크르

에르메스 주얼리를 대표하는 디자인인 샹 당크르는 프랑스어로 닻줄이라는 의미로, 1938년 4대 에르메스 회장인 로베르 뒤마가 부두 근처를 산책하며 배에 연결된 닻을 보고 영감을 받아 디자인된 것이다. 당시 대서양을 횡단하는 여객선에서 모토를 따온 에르메스의 샹 당크르는 브랜드의 중요한 영감 중 하나인 ‘여행’을 상징한다.

샹 당크르는 처음에는 주얼리 컬렉션에 사용되어 팔찌 등으로 선보였지만 점차 가방, 실크, 홈 컬렉션 등 다양한 제품에 모티프로서 적용되는 에르메스 고유의 상징이 되었다.

 

에르메스 캘리 백

 

켈리 백

켈리 백은 1837년, 에르메스 창립 당시 기수들이 사냥을 나갈 때 사용하던 ‘새들 캐리어’라고 불리는 백으로 처음 선보여졌다. 이후 여성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작은 크기로 만들어지면서 ‘쁘띠 삭 오뜨 아 크루아’라는 이름으로 제작되었다.

 

 

오렌지 상자/사진출처=에르메스

 

로베르 뒤마의 경영과 캘리 백

로베르 뒤마는 1951년 장인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가 사망하자 가업을 계승하고 동서인 장 르네 게랑과 긴밀하게 협력해 나가며 에르메스를 경영했다. 로베르 뒤마는 사륜마차 로고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오렌지 상자로 상징되는 브랜드 이미지를 발전시켜갔으며 1951년, 에르메스의 첫 번째 향수인 ‘오드 에르메스’를 출시했다.

 

 

그레이스 켈리가 에르메스 켈리 백을 들고 있는 모습

 

로베르 뒤마는 에르메스의 대표 제품인 켈리 백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1956년, 모나코의 왕세자비 그레이스 켈리가 에르메스의 ‘쁘띠 싹 아 끄로와’를 들고 임신한 배를 가리고 있는 사진이 ‘라이프’ 잡지를 통해 공개되면서 사람들은 이 백을 켈리 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에 로베르 뒤마는 직접 모나코 왕실에 찾아가 이 가방의 이름을 켈리라고 지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고 공식적으로 켈리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1976년 에르메스 그룹은 지주회사를 설립하여 띠에리 에르메스의 여러 자손들이 함께 경영권을 가지게 되었다.

 

 

에르메스의 장 루이 뒤마 회장

 

 장 루이 뒤마의 경영

1938년에 출생한 로베르 뒤마의 아들 장 루이 뒤마가 1978년에 에르메스를 맡으면서 5세대 경영이 시작되었다. 장 루이 뒤마는 사촌들의 도움을 받아 에르메스에 변화를 가져왔다. 장 루이 뒤마는 에르메스에 실크, 가죽, 기성복 라인을 더욱 발전시켰고, 스위스 베른에 시계부문 자회사인 ‘라 몽트르 에르메스’를 설립하였으며, 이어 팔찌, 자기, 크리스탈 등의 제품 라인을 추가하며 에르메스에 제2의 전성기를 가져왔다.

1980년에는 19세의 젊은 디자이너 에릭 베르제르(Eric Bergere)를 에르메스 여성복의 디자이너로 임명했다.

 

 

에르메스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베로니크 니샤니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베로니크 니샤니안

1980년대 에르메스는 패션 디자이너와의 교류를 통해 에르메스가 가진 전통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이에 1988년 1월, 에르메스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베로니크 니샤니안을 영입했다. 베로니크 니샤니안은 ‘에콜 드 라 샹브레 신디칼 드 라 꾸뛰르 파리지엔’을 졸업하고 세루티에서 남성복 디자이너로 12년 동안 경력을 쌓은 디자이너였다.

베로니크 니샤니안은 에르메스에 합류한 1988년, 파리 ‘젊은 패션 디자이너 경연(Young Fashion Designers Competition)’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이후 2009년 2월 에르메스 남성 제품군의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악셀 뒤마/사진=에르메스

 

2004년 에르메스의 CEO가 된 파트릭 도마는 에르메스 가문이 아닌 에르메스의 첫 번째 전문 경영인이 되었다. 2006년 1월, 장 루이 뒤마는 은퇴를 선언했고 2010년 5월 사망했다. 2010년부터는 라코스테(Lacoste)의 아티스틱 디렉터였던 크리스토프 르메르(Christophe Lemaire)가 여성복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2014년 3월에는 에밀 모리스 에르메스의 증손자인 악셀 뒤마가 CEO를 맡음으로써 전문 경영인 체제에서 다시 오너 체제로 변경되었다.

'에르메스(Hermès)'의 지금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경제가 주춤하면서 에르메스 1분기 '일본 제외 아시아태평양 지역' 매출이 6억 유로로 작년 동기보다 9% 줄었다. 이 지역은 원래 에르메스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는 곳이다.

에르메스의 1분기 세계 전체 매출은 16.4%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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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스토리] 프랑스의 럭셔리 브랜드, '에르메스(Hermès)'의 시작과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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