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에서 8월 22일까지 공연

송원근, 차지연/사진 = ㈜아떼오드 제공
송원근, 차지연/사진 = ㈜아떼오드 제공

[문화뉴스 문수인 기자]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울컥하기도 했지만, 어떨 땐 그 말이 판타지 같기도 하다.

실현 가능성 따위 열어두지 못하고 그저 '살기 위해' 또는 '버티기 위해' 최선을 택한 이들도 있을 터다.

판타지같은 말이지만, 뮤지컬 <레드북>속 안나는 이것이 당연한 것임을 일깨운다.

'나'로 태어났기에 '나' 그 자체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세상 모든이들에게 정당화시킬 순 없지만,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서로의 존재 가치를 느끼며 사는 것을 말이다.


뮤지컬 '레드북'의 배경은 19세기 영국으로 여성의 인권은 그저 남성의 소유물로서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전부였다. 남녀 같은 신체 부위여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언급하길 꺼려했던 사회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서도, 욕망을 말해서도, 하고 싶은 꿈에 대해서도 쉽사리 꺼낼 수 없었다.

뮤지컬 <레드북>은 시도하지 못했던 걸,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것을 꺼내고 사회에 올린 여성작가 '안나'의 이야기이다.

첫 장면, 바이올렛 할머니의 재산을 전해주기 위해 그의 손자인 변호사 청년 브라운이 안나를 수소문할 때 사람들은 고개를 젓는다. 안나는 이상한 여자라며 병적으로 미친 사람인 것 마냥 낙인되어 있었다.

 

서경수, 김세정 /사진 = ㈜아떼오드 제공
서경수, 김세정 /사진 = ㈜아떼오드 제공

 

브라운 역시 그 시절, 영국 신사다워야 했고 보수적이었다. 차별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것이 신사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라고  그와 그의 동료들은 등장부터 외치면서, 안나의 권익적인 행동에 계속해서 걸리고 또 걸렸다.

브라운은 수많은 고민과 번뇌를 했다. '신사'라는 자신의 이름표를 들여다보며 과연 "'신사'다운 것은 무엇일까?"부터 그러면 "나는 왜 '신사'인가"까지, 안나를 만나고부터 예기치 못한 충돌과 물음들이 있었지만 브라운은 안나를 지지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재산 상속조차 어려웠던 사회에서 안나는 작가로서 ‘나’에 대한 입지를 증명하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를 행사한다.

그 어려운 여정의 시작인 여성 글쓰기 모임 ‘로렐라이 언덕’. 그곳엔 자신의 상처와 트라우마, 첫 사랑과 옛 추억 등 보따리에 담긴 이야기를 말하는 곳이기도 했다. 

 

뮤지컬 '레드북' /사진=㈜아떼오드 제공
뮤지컬 '레드북' /사진=㈜아떼오드 제공

 

우리 모두에겐, 저마다 로렐라이 언덕같은 곳이 있을 거다. 완벽한 타인이었지만 사랑하는 그 누군가일 수도 있고 로렐라이 언덕과 같은 자연의 공간일 수도 있고, 작은 일기장일 수도 있다.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로렐라이 언덕같은 곳이 없다면, 찾아보면 어떨까 싶다.

꾹꾹 당신을 눌러 담은 것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면, 쌓아두지 말고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안나는 이전에 남편을 여의고 혼자 지내던 바이올렛 할머니의 하인으로 취직했었던 날을 회상한다. 바이올렛 옆엔 늘 자신이 있었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외로웠던 그녀의 일상에 이야기는 생기 그 자체였고, 사랑을 할 수 있음을 일깨웠다.

글은 말에서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내 말이 어떤 한 사람에게 이야기가 되었을 때, 활자로 옮겨보면 힘이 실린 새로운 형태의 글이 된다. 그 힘은 개개인마다 가진 도구로 다르게 나타난다.

 

“글을 써봐.”,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봐.”

 

이 말이 기자인 입장에서 얼마나 힘이 되던지. 바이올렛 할머니가 안나에게 전한 그 문장은 관객들에게 전달되어 당신다운 것을 하라고 말했다. 저 깊이 두려움에, 피치 못할 사정에 꺼내지 못한 꿈, 다시 잠들어버린 나의 이야기를 깨워주고 있었다.

사회에 맞선 안나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제2의 안나가 되고 싶어 로렐라이 언덕에 오지만, 모임을 주관하는 로렐라이와 도로시는 제2의 안나는 필요 없다고 말한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오직 ‘나’로 존재하는 당신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관객들에게 말한다. 

뮤지컬 '레드북'/사진=㈜아떼오드 제공
뮤지컬 '레드북'/사진=㈜아떼오드 제공

 

이 공연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 무대를 찾아온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하는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구현한다. 이 사회의 구조와 체계를 뚫고 너는 할 수 있고 또 해낼 것이라고, 레드북의 안나와 브라운이, 로렐라인과 도로시, 그리고 모든 앙상블들이 다가와 토닥여주는 것만 같았다.

특히 '레드북'의 인기 넘버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은 가슴을 울린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가사를 통해 '나'를 들여다본다. 성별을 떠나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나로서 살 권리가 있다.

뮤지컬이 담은 당시의 시대와 지금의 한국 사회, 세계의 서버망을 비교해 본다. 21세기 안나는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을까. 안나처럼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될 때까지 말하고 떠드는 이들과 연대한다.

 

"사람들은 왜 제가 솔직할수록 저를 싫어하죠?

그냥 난데.“

 

아이비, 인성 /사진 = ㈜아떼오드 제공
아이비, 인성 /사진 = ㈜아떼오드 제공

 

'안나' 역은 차지연, 아이비, 김세정이 연기한다. 특히 김세정의 연기는 패기가 넘쳤고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다. 가끔은 울컥하게 만들기도 했다.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에게 없을 때도 김세정은 자신의 감정을 차오르게 했고, 그 눈빛은 그 시대로 들어간 듯 몰입되어 있었다. 상대의 대사를 들으며 곰곰이 생각했고, 홧김에 나와야 하는 대사도 자신만의 색깔로 표현해 안나의 대담함을 표현했다. 뮤지컬 배우로서 김세정의 발돋움을 많은 관객들이 지켜보며 행복해했다.

외운 대본을 그저 읊으며 상황을 넘기려는 모습이 무대에서는 더욱 잘 드러나고 이는 관객들이 더 잘 안다. 그런 배우는 레드북 무대에 단 한 명도 없었다. 무대에 등장함과 동시에 끝까지 충실하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만들어 입은 자신의 역할에 가치를 부여하며 소중함을 느끼고 있음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뮤지컬 '레드북' 앙상블/사진=㈜아떼오드 제공
뮤지컬 '레드북' 앙상블/사진=㈜아떼오드 제공

 

‘레드북’ 초연 때부터 계속 일인이역으로 ‘로렐라이 언덕’의 회장 ‘도로시’와 브라운의 할머니 ‘바이올렛’ 역을 맡아 온 배우 김국희 연기도 인상적이다. 로렐라이 역에 정상윤도 자신만의 호흡으로 무대에 색채를 풍성하게 더했다. 뮤지컬 <레드북>의 배우들은 보통 1인 다역을 소화해 객석에 여러 가지 감정을 불어넣으며 극을 이끈다.

배우들의 명암을 만들어준 조명도 큰 몫을 한다. 튀지 않고 스토리와 여러 장치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며 <레드북>이라는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구태여 설명하지 않고도 온전히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한다.

뮤지컬 <레드북>은 ‘나’를 아는 것, ‘나’를 말하고 표현하는 것, ‘나’로서 살아가는 것에서 출발하는 또 다른 시작점에 다시 서게 한다. 

한편, 뮤지컬 <레드북>은 서울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에서 8월 22일까지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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