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춤의 언어로 진실을 찾아가는 유의미한 춤판을 계속 펼쳐가기를
시 패강가 10수는 백호 임제가 35세(1583년, 선조 16년)에 평안도 도사(都事)로 부임한 후 패강 주변의 풍광과 역사 문화 유적을 구경하고 지은 칠언절구 연시입니다.
이 시는 고구려의 동명성왕과 고조선의 기자(箕子)와 위만(衛滿) 등의 인물, 그리고 문무정과 백운교, 칠성문과 영명사 등의 소재에 인간사를 곁들인 내용이 5수,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 시가 3수, 작품의 시작과 끝에 서사와 결사에 해당하는 시가 각 1수씩 포함되어 총 10수로 구성됩니다.

들숨무용단이 무대에 올린 춤 '패강가 10수'를 관람할 때 특히 세 가지의 내용에 관심을 가져 보았습니다.
첫째, 시작품 속 인물과 유적의 서사가 춤으로 어떻게 구현될까? 둘째, 시 패강가에 나타난 이별의 한과 재회에의 소망의 정서가 춤사위를 통해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 마지막으로, 춤 공연을 통해서 문사(文士)로서 호방한 풍류적 인생을 살았던 백호 선생을 만날 수 있을까였습니다.
먼저, 시 패강가 속의 인물과 유적 이야기를 춤 패강가에서 어떻게 표현하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구체적인 언어로 서술한 인물과 유적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춤 패강가에서는 이를 구현하기 위해 안무에 영상과 음악을 결합했더군요. 무대 뒤쪽 벽면 스크린에 패강의 풍광과 관련 유적 영상을 띄우고, 무대 귀퉁이에서 악사나 가수가 춤 패강가의 분위기에 알맞은 연주를 하고, 안무가는 동선에 따라 펼치는 춤사위를 통해 시적 화자가 말하려는 서사와 섬세한 정서를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춤으로 보여주기 어려운 인물에 관한 서술과 유적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식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약간 아쉬웠던 점은 영상이 너무 과다하게 제시된 점입니다. 춤 패강가 10수의 공연에서 각 수의 시작과 주요 부분에 패강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너무 많이 제시하는 바람에 감상자의 시선이 산만하게 분산되고, 따라서 공연 감상의 몰입도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둘째, 시 패강가에 두드러지는 이별의 한과 재회를 소망하는 정서가 안무를 통해서 어떻게 형상화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시 패강가에서 이별의 슬픔과 재회에 대한 소망의 정서는 제6수와 제8수의 버드나무 가지의 이미지에 집약돼 있습니다.
패강의 아가씨 봄나들이 나섰다가 / 강가 능수버들을 보니 애간장이 끊어지네 / 가느다란 버들 실로 비단을 짤 수 있다면 / 고운 임 위해 춤 옷을 지으리 (제6수 전문)
이별하는 사람이 날마다 꺾는 버드나무 가지 / 천 가지 다 꺾어도 가는 임 못 붙잡네 / 어여쁜 아가씨 한 많은 눈물 탓에 / 지는 해 부연 물결도 시름에 잠겨 있네 (제8수 전문)
예전에는 연인이 이별할 때 재회의 소망을 버드나무 가지에 담아 사랑의 징표로 건네주었다고 합니다. 척박한 땅에 심어도 소생하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이 지속되기를 희구했기 때문입니다.
춤 패강가에서는 잎 달린 버드나무 가지를 소품으로 사용합니다. 춤 패강가 제6수에서 남성이 망사처럼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윗옷을 벗어 던지고 춤을 추다가 쓰러져 움직임을 상실합니다.
그러자 버드나무 가지를 손에 쥔 여성이 남성의 주위를 천천히 돌아가며 춤을 춥니다. 여성이 쓰러져 누운 남성의 몸을 버드나무 가지로 간절한 몸짓으로 어루만지자 바닥에 쓰러졌던 남성이 의식을 회복하고 일어섭니다.

그리고 다시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남성 안무가의 윗옷은 시 패강가 제6수에 나오는 ‘춤 옷’을 연상시킵니다. 임과 이별한 여성이 임과 재회를 하지 못해 애달파하면서도 임에게 전해 주고 싶다는, 사랑의 상징인 ‘버들 실로 지은 비단 춤 옷’ 말입니다.
시 패강가에 나타난 이별의 한과 재회에의 소망의 정서는 일종의 관념입니다. 관념을 춤 패강가에서 버드나무 가지를 사용한 춤사위로 형상화한 것은 탁월한 결과물로 보입니다.
셋째, 춤 패강가 공연을 통해 백호 선생을 만났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만났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춤 공연장이나 공연 과정에서 백호 선생의 사진도 접하지 못했지만, 백호 선생이 쓴 시 패강가 10수를 춤으로 해석한 공연을 본 이후에 백호 선생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으니 결국 그분과의 만남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춤 패강가를 보기 전에 제가 문학 서적과 인터넷 자료를 통해서 알고 있었던 백호 선생은 기이한 문사(文士) 내지 자유로운 풍류객이었습니다. 그분은 평양에 관리로 부임 도중에 기생 황진이 무덤을 찾아 술을 따르고 시를 지은 바람에 법도를 모르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 파직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또는 당시 격화된 당쟁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내던지고 명산대천을 방랑하며 음풍영월(吟風詠月)한 자유로운 풍류객이었습니다. 그러나 춤 패강가 공연을 관람한 후에 백호 선생에 대해 궁금증이 생겨 논문을 검색하고 백호문학관 학예연구사에게 확인한 결과 제가 알고 있던 백호 선생 관련 내용은 대부분 사실과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그분이 황진이 무덤을 찾아 술을 따르고 시를 지은 것은 확인되지만, 그로 인해 파직이나 문책을 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해당 기록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한 근거였습니다.
백호 선생이 관직을 사직했다는 것도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분은 1577년 29세에 알성시 문과에 급제하여 1579년 고산 찰방, 1580년 서북도 병마평사를 거쳐 1582년에 고흥 현감에 부임하였습니다.
1583년 외관직인 평안도 도사로 파견되었다가 2년 임기가 만료된 1585년 고흥 현감으로 복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북 지역의 추운 험지에서 근무하다 발병한 폐병을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587년 만 3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관직 재임 중에 사직했다는 기록은 정사(正史)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백호 선생이 황진이 묘소를 찾은 이유로 파직당했다는 내용과 당쟁에 환멸을 느껴 관직을 사직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백호 선생은 38년의 길지 않은 생애에 한시 700여 편과 시조 4편, 한문 소설 3편 등,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허균이 그 작품 전반을 평가하며 ‘인류 문화가 생긴 이래 별문자(別文字)이다. 천지간에 이 문자를 얻지 못했다면 하나의 결함이 될 것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니 우리도 그 작품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백호 선생은 고루한 유교적 사고와 신분 차별이 극심했던 조선 시대에 평등의 시각으로 사람을 보려고 했던 시대의 선각자였습니다. 그분의 황진이 사건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기생 황진이는 비록 천민이었지만 '동짓달 기나긴 밤에'와 '청산리 벽계수야' 등의 명시를 남긴 걸출한 시인이었습니다. 백호 선생은 평소에 시인 황진이를 마음 깊이 인정하였고, 그래서 평안도 도사로 부임 중에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무덤을 찾아 예를 표하고 만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시를 남긴 것입니다.
텍스트의 무한한 자기복제와 변형이 이루어지고 진실을 말하는 자료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허위 자료가 월등한 조회 수를 기록하는 sns 시대, 들숨무용단이 언어가 제거된 간절한 춤의 언어로 진실을 찾아가는 유의미한 춤판을 계속 펼쳐가기를 기대합니다.
글: 조영환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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