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함익' 리뷰

   
 

[문화뉴스] 400여 년 전, 셰익스피어의 손끝에서 탄생해 우리 앞에 등장한 '햄릿'은 시대와 공간을 거치며 빛이 바랠 법도 하건만, 여전히 '비극의 정수'라 불리며 선연한 빛살로 많은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고 있다.

최고의 비극적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햄릿'은 그간 우리의 인식 속에서 온갖 슬픔과 원망을 지닌 채 아무 것도 실천하지 못한 비참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여기, 비참한 인간이 한 명 더 있다. 김은성 작가와 김광보 연출에 의해 햄릿을 전신으로 삼고 재탄생된 '함익'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대표되는 햄릿의 고뇌는 "살아있는가, 죽어있는가, 그것이 문제로다"를 고민하는 함익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대기업 오너의 딸로 살아가는 함익. 2016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여자 햄릿'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기대하고 봤지만, 연극 '함익'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감히 이렇게 말한다. 햄릿과 줄리엣의 모티브를 차용한 전혀 새로운 우리 시대의 비극이라고 말이다.

함익은 친부와 계모,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난 영악한 남동생 사이에서 그저 허울뿐인 가족 노릇을 하고 있다. 온 가족이 예뻐하는 원숭이 햄릿마저 그녀를 무시할 정도로, 그녀는 가족 사이에서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오필형이라는 약혼남이 함익의 애정을 갈구한다. 아니, 애정을 갈구한다기 보다는 함익의 넉넉한 배경을 필요로 한다. 무기력한 그녀의 일상에서 유일한 버팀목은 그녀의 분신 '익'이다.

 

   
 

함익의 건조하고 희미한 생명력이 가장 역동적으로 빛을 발하는 순간은 바로 익과 대면할 때다. 익은 함익의 분신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어둠으로 범벅된 함익과 반대로, 익은 하얗고 풍성한 그리고 자칫 들떠 보이기까지 하는 곱슬머리를 하고 있다. 익의 목소리, 발걸음, 몸짓은 함익에 비해 한결 가볍고 발랄하다. 함익은 익과 있을 때 가장 인간다워진다. 매 순간 억눌려진 감정으로 일관된 함익이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해방하는 유일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함익은 햄릿의 방대한 독백 대신 익과의 대화로 내면의 고뇌를 표현한다.

함익을 인간적으로 만들어주는 또 다른 존재인 정연우는 연극을 진지하게 공부하고 있는 연극학도다. 자기감정에 충실하며 진솔한 그는 연극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배우로서 아주 정직한 모습을 취한다. 특히 그가 연극 '햄릿'의 첫 리허설에 들어가기 전 혼자 외우는 '배우의 기도문'은 흠잡을 데 없는 바람직한 배우의 태도이기도 하다.

극 결말에 함익은 자신이 믿던 연극, 자신이 좋아하던 연우에게 배신당한다. 그녀는 햄릿의 비극성은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고, 감정이 아닌 지위를 통해서 연우에게 다가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햄릿은 연극을 통해 진실을 찾아내고, 함익은 연극에 자신의 감정을 대입하다 도리어 연극에게 배반당한다. 결국 삶에 대한 의지를 심어주던 두 존재에게 모두 배척당하며 궁지에 내몰리는데, 여기서 함익은 결연해진다. 분신 익과 이별하고, 원숭이 햄릿을 처참하게 죽임으로써 말이다.

 

   
 

그녀는 복수에 대해 고뇌하지 않았고, 친모의 죽음의 배후를 의심하지 않고 단정 지었다. 연우와의 사랑을 통해 달콤한 줄리엣의 삶도 꿈꾸었지만 그 꿈도 산산조각 났다. 결국 함익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각자 관객의 상상력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결말을 지을 수 있겠지만, 극에서의 함익은 주체성이 결여된 수동적 존재였다가 감정을 폭발적으로 표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앞으로 그녀가 삶을 어떻게 영위할 것인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죽어있는' 삶 대신 '살아있는' 삶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 그녀를 마주한 순간, 집을 박차고 나간 '노라'의 모습이 포개어졌다. 노라가 '인형의 집'을 가출한다는 결말은 당시 많은 문인들에게 충격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나 우리나라의 채만식은 노라가 집을 나간 후 독립생활을 실패했다는 내용을 덧붙인다. 이광수 또한 노라에게 '네 남편에게', '규문 안으로' 돌아갈 것을 재촉한다.

함익이 생명력 넘치는 삶을 택한 것이 이후 어떤 시련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더구나 이후의 삶 자체를 영위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도 확신 있게 답할 수 없다. 함익의 이후의 삶은 오롯이 관객 개개의 상상력에 달렸다. 그러나 함익이 이후 어떤 실패를 맞이한다고 해도, 그녀 자신이 삶을 향한 의지를 표출했다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작가 김은성은 "복수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랫동안 마음을 병들게 한 게 중요한 것이다"라며 "나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인 햄릿의 고뇌는 우리의 삶에 대입해보기에는 너무 고결했다. 삶을 전제로, '살아있는' 삶과 '죽어있는' 삶의 기로에서 고뇌하는 함익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공간을 담아낼 수 있는 비극적 인물의 표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연극이 막을 내리고 커튼콜에서 배우와 제작진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면서까지, 심지어 극장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까지도 '함익'이 가진 비극성에 젖어있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 미묘하게 바뀐 연극의 어조, 섬세하게 설명된 대사, 천연스럽게 변화시킨 캐릭터, 배우들의 치열한 연기 등은 원작 '햄릿'에게서 느껴지던 거리감을 좁혀 동시대 가장 비극적인 '햄릿'을 만들어냈다. 

이런 식의 적극적인 재해석과 재창작은 셰익스피어를 여전히 '살아있는' 작가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수세기를 거쳐 셰익스피어가 전해지는 동안, 셰익스피어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찾는 일은 모든 독자(및 관객)들의 숙제가 되어버렸다. 물론 햄릿의 목소리를 내 삶의 실존과 마주하게 할 수 있는 관객들도 적지는 않지만,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우리의 시공간에 맞게 다시 읽어보고, 느껴보고, 고쳐볼 용기가 필요했다. 김은성 작가와 김광보 연출은 '함익'을 통해 그 용기의 희망적인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들의 또 다른 협업이 매우 궁금해진다.

[글] 문화뉴스 장기영 기자 key000@mhns.co.kr
[사진] 서울시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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