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여러 독립영화 배급사에 문의했다. 한 배급사의 회신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영화의 '나쁘다'와 '좋다'를 따지기 전에 외적인 환경 때문에 배급 계약이 힘들다고 했다. 목숨을 걸고 찍은 영화였는데, 전 세계 평화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소통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인터넷 개봉을 하고 싶지 않다."
 
여기 춤과 영화를 결합한 '시네-댄스'라는 장르의 다큐멘터리화를 통해 평화를 기원하는 감독이 있다. 사유진 감독이 시도하는 '햇살댄스프로젝트'다. 햇살댄스프로젝트는 세계사와 한국의 근·현대사 중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 대량학살인 '제노사이드(Genocide)'와 관련된 춤 연작 프로젝트다. 사 감독은 학살 현장에서 죽어간 자들을 위한 '위혼'과 더불어 소통과 치유를 기원하고자 한다. 
 
햇살댄스프로젝트는 2012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햇살댄스프로젝트 Ver. 광주'를 시작으로, 2013년엔 첫 번째 외국 프로젝트인 '피스 인 티베트 : 눈물의 춤'을 만들었다. 티베트의 독립을 염원하며 분신자살을 한 이들을 위로하는 작품이다. 이어 2014년엔 제주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제주 : 년의 춤'을 만들었다. 4.3 사건 중 '도구'이자 '수단'으로 취급된 여성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 '제주 : 년의 춤' ⓒ 사유진 감독
 
사유진 감독은 앞으로 햇살댄스프로젝트를 외국 지역으로 확대해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량학살,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대인 대량학살, 중국 난징 대학살, 캄보디아 킬링필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인민 학살 사건 등을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개봉은 여의치 않다. 영화가 주는 무게감 때문에 배급사를 찾기가 어려웠고, '피스 인 티베트 : 눈물의 춤' 시사 당시엔 경찰의 조사까지 받기도 했다. 그런에도 꿋꿋이 햇살댄스프로젝트를 만들고자 하는 사유진 감독은 어떤 계기로 작품을 만들게 됐을까? 그리고 어떻게 '시네-댄스'라는 춤과 영화의 결합을 시도하게 됐을까? 대학로에 있는 문화뉴스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시네-댄스'와 '제주 : 년의 춤'에 대해 영상 소개 인사를 살펴본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 계기를 들려 달라.
ㄴ 1996년 서울예대 영화과 졸업해서 충무로에서 3~4년 동안 조감독을 했다. 당시 페이는 4년에 60만원이었다. 한 작품은 연출부 세컨드였고, 두 번째 작품은 조감독으로 했는데 개런티로 통장에 입금된 것은 그 정도였다. 당시는 젊기도 했다. 그런 페이에 대해 요즘은 '열정페이'라고 하는데, 그땐 그런 게 통용되는 시기였다. 답답했지만, 돈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충무로라고 하는 거대 산업영화 구조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공교롭게도 다큐멘터리를 해야겠다는 소스를 얻었다. '휘슬 블로어'라고 하는 내부고발자 이야기였다. 충무로에서 산업 영화를 만드는 50군데에 기획안을 보내면서 물어봤다. 한 영화 제작사 대표님이 한마디 하시는 말씀이 기억난다. "우리는 상업영화를 하지, 다큐멘터리를 지원하고 제작하지 않는다"였다. 이게 충무로의 현실이구나 했고, 다큐멘터리적인 기질이 너무 잘 맞았다.
 
   
▲ '피플 오브 노 리턴' (2005년)
'시네-댄스'라는 장르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ㄴ 북한에 끌려가신 납북자 이야기인 '피플 오브 노 리턴'(2005년)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적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끌려온 인물도 있고, 정전 이후 납북하신 분들도 있다. 미귀환자가 아직도 400여 명이 있는데, 자료를 찾고 인터뷰를 하는데 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작품을 만들다 보니 40대 초반이 됐다.
 
그러다 다큐멘터리를 모르는 분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강한 메시지의 전달 방식이 답답하게 왔다. 꼭 이런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자조 섞인 회의감도 들었다. 이전에 나는 공연 작업을 했다. 공연 분야의 영상감독인데 한국무용, 현대무용, 창극, 퍼포먼스, 마임, 연극, 국악 등의 작업을 많이 했다. 그중 무용수들이 백스테이지에서 연습하는 모습, 공연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신체가 아름답고 솔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비디오 영상 매체로 인간의 몸을 어떻게 녹여 접목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그래서 '시네마 댄스'의 줄임말로 '시네-댄스'라는 말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세 편을 만들어 왔다. 기존 다큐멘터리의 메시지 전달방식에 탈피해, 추상적이지만 관객들이 상상력을 느낄 수 있도록 하려 했다.
 
아쉽게도 현대영화의 흐름과 맞지 않았다. 너무나 설명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야 관객이 무난하게 잘 본다. 소비되는 패턴의 영화를 좋아한다. 내 작품은 소비적 취향이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추구하면서 만드는 생산적인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의 예술영화 스타일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아쉽게 독립영화를 배급해주는 배급사들이 모두 다 거부했다.
 
   
 
 
'시네-댄스'라는 용어가 매우 인상적인데, 일반 관객들이 생각하는 댄스 소재 영화와는 어떤 차별점이 있나?
ㄴ 영화와 춤을 주제로 교양과목 강의를 자주 나간다. 영화사 120년을 살펴보면, 춤으로만 표현하는 감독님이 계신다. 그것을 '거룩한 계보'라고 여기고, '계보학'을 만들었다. 마야 데렌 감독이 춤과 영화를 섞어서 '댄스 필름'을 만들었다. 그 단어는 나중에 알게 되어서, '시네-댄스'도 '댄스 필름'이라고 말을 바꿔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마야 데렌 감독의 정신에 부합하려고 한다.
 
이후 1971년 헝가리의 미클로 얀초 감독이 만든 '붉은 시편'이 있다. 1972년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데, 작품의 시퀀스가 7~8개로 되어 있고 롱테이크로만 만들어져 있다. 20년 전 영화를 전공할 때 보면서 큰 기억으로 남게 됐다. 여기에 1981년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피의 결혼식'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님인데, 플라밍고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표현한 영화다. 내가 4~5번째로 그 '거룩한 계보'를 잇고 있다고 본다.
 
현대 영화는 너무나 작위성이 강하다. 우연성은 남발되고, 감독의 지나친 호소력이 느껴진다. '곡성' 같은 영화는 감독의 작위적인 내용이 많다. '곡성'의 추상성도 있지만, 불가지론에 가깝다. 감독 자신도 물어보면 모를 것 같다. 영화의 베이스는 사진으로부터 이어온 비디오 영상 이미지인데, 관객들에게 토끼몰이처럼 한 방향만으로 전해지는 게 아쉽다. 관객들도 각자가 살아온 패턴이 있다. 관객 자체가 하나의 '철학자'인데, 영화는 풍부한 해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런 방식을 어필하고 싶어서, 무용이라는 추상성을 도입하게 됐다.
 
   
▲ '햇살댄스프로젝트 Ver. 광주' ⓒ 사유진 감독
 
다큐멘터리를 보면 내레이션을 사용하는 작품도 있고, 아닌 작품도 있다. 연출하면서 장단점이 있다면?
ㄴ 기본적인 성향으로 나는 내레이션은 별로 안 좋아한다. 숨겨진 정보 전달을 제일 빨리할 수 방식은 '헤드토킹'이다. 카메라 앞에 정면으로 앉혀 인터뷰를 하고, 그럼에도 정보전달이 잘 안 되니 해설을 친절하게 입힌다. 온갖 반찬을 상에 놓고, 수저를 입에 넣어주는 것이다. 시간은 없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아서 해설을 주로 하는 편인데, 해설 없이 관객의 몫을 넘기는 작품도 있다.

첫 번째 '시네-댄스' 작품 이야기를 해보겠다. '햇살댄스프로젝트 Ver. 광주'(2012년)는 어떤 내용인가?
ㄴ 일련의 프로젝트로 '햇살댄스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 한겨울에 상처가 터질 때, 햇살을 받으면 자연 치유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그것을 춤으로 느껴보자는 의미로 '햇살댄스프로젝트'라는 이름을 지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야기를 했는데, 5명의 무용가가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현장에서 5곳으로 흩어져 오후 5시가 되면 자신의 느낌대로 춤을 추는 것이다. 일정한 안무도 없고, 안무의 끝도 정하지 않았다.
 
워크숍을 통해 5.18의 배경을 설명하고, 장소도 설명하면 장소에 맞는 춤의 선택은 본인이 했다. 무용가들이 안무와 의상을 다 준비했다. 5시에 동시 다발로 흩어졌고, 15분, 35분 등 다양한 시간 동안 춤을 통해 표현했다. 이 중 평화시장 맨홀 뚜껑 위에 23살의 임산부가 퇴근길 남편을 기다리다가 조준사격을 당해 사망을 했었다. 최아름 무용가가 그 맨홀 뚜껑 위에서 춤을 추는데, 알고 봤더니 그 임산부의 어머니가 아직도 그곳에 살고 계셨다.
 
희생자 영령을 위해서, 춤을 통해 위로하는 영화를 만든다고 말하니 고맙다고 하셨다. 옆에 계신 어머니가 처음엔 낯설게 보다가, 12분 정도 지나니 자기 딸로 인식했고, 다 끝나고 나니 무용가와 어머니가 껴안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 이 형식이 성공적이구나. 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희생자와 위혼을 해주는 자가 결합해 하나가 됐다. 이 영화에 힘이 있겠구나 싶었다. 당시 광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지만, 대사가 없이 몸짓만 있는 95분 러닝타임에 낯설어하신 분들이 많았다.
 
   
▲ 햇살댄스프로젝트 Ver. 광주' (2012년) ⓒ 사유진 감독
 
두 번째 햇살댄스프로젝트 작품은 '피스 인 티베트 : 눈물의 춤'(2013년)이다. 티베트 분신한 희생자를 기리는 영화다. 작품을 하게 된 이유는?
ㄴ 신문에서 우연히 인도 뉴델리에서 분신해 돌아가신 티베트 사람의 사진을 봤다. 충격을 받았다. 한국 사회에서도 민주화 운동 당시 70여 명이 분신해 세상을 떴다. 20세기 때 그러한 분신이 종료된 줄 알았는데, 21세기에도 분신자살자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됐는지 궁금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 설산, 불교국가로 한 번쯤 가볼 곳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중국을 통해 자유가 없어졌다는 것을 생각해봤다.
 
티베트의 린포체라는 고승이 있다. 법회를 하러 한국에 오셨는데, 같이 수행하면서 법회를 하는 장면을 찍었다. 수행하는 라마들이 스님들과 지내면서 너무나 순박하고, 따뜻했고, 외면과 내면이 한국인과 흡사했다. 친밀감이 쌓였다. 그러다 티베트 독립을 위한 분신자들이 늘어났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분들에게 티베트 상황을 들어볼 수 있었다.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베트 문제에 대해 지상파, 신문에서 다뤘긴 하지만 작품을 통해 다룬 것은 있지 않았다. 큰 결심을 하고, 1년 후에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곳에 갔다. 사실 인도 뉴델리에서 분신하신 그 자리에서 그분 뿐 아니라 돌아가신 분들 모두 진혼하는 춤을 하고 싶었다. 인도가 사람이 많다. 좋은 취지로 한다고 해도 사건·사고가 일어날까 봐, 뉴델리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물어봤더니 정치적이어서 안전상 책임을 못 지겠다고 했다. 결국,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에 가서 2주 정도 머물며 영화를 찍었다.
 
중국은 화평정책으로 티베트에 침공하면서, 여러 정책을 펼쳤다. 티베트 수도인 라싸에 철도를 연결했고, 베이징에서 열차를 타고 이주민을 유입시켜 결혼을 통해 싹을 없애려 했다. 티베트의 자원도 많은데 이것도 다 파헤쳐 가고, 티베트의 고유 사원 6,000여 개를 무너뜨려서 50여 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이 작품의 테마는 고통받는 티벳 사람뿐 아니라, 땅을 포함해 진정한 평화가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평화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피스 인 티베트 : 눈물의 춤' 포스터 ⓒ 사유진 감독
 
중국 정부에서 클레임이 오지 않았나?
ㄴ 겁도 많이 났다. 나중에 조계사에서 시사하려고 했는데, 당시 경찰 외사과에서 거부했다. 명보아트홀로 이동해서 시사하려는데, 현장에서도 외사과 형사가 감시하고 있었다. 중국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당연히 중국의 사찰대상이 되지 않을까 했다. 그래서 이렇게 앉아서 멍청하게 당하느니, 상해국제영화제에 대놓고 작품을 출품했다. 당연히 떨어졌다. (웃음)
 
중국에선 티베트 관련 분신자의 문서 하나만 가져도 종신형에 처한다고 하는데, 그 심장부에 영화를 보냈으니 내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출품이 되지 않아서, 달라이 라마가 한국에 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다큐멘터리 기획안을 세워봤다. 그러나 영화진흥위원회 등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다큐멘터리 펀드에 물어봤더니, 펀드가 전혀 되지 않아 묵혀둔 기획안으로만 갖고 있다.
 
당연히 정식 개봉도 되지 않았다.
ㄴ 여러 독립영화 배급사에 문의했다. 한 배급사의 회신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영화의 '나쁘다'와 '좋다'를 따지기 전에 외적인 환경 때문에 배급 계약이 힘들다고 했다. 목숨을 걸고 찍은 영화였는데, 전 세계 평화에 관해 이야기 하려고 했는데, 소통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인터넷 개봉을 하고 싶지 않다.
 
   
▲ '제주 : 년의 춤' ⓒ 사유진 감독
 
가장 최근에 만든 작품은 '제주 : 년의 춤'(2014년)이다. '4.3 사건'을 다룬 작품인데, 어떻게 하게 됐나?
ㄴ 2006년에 '4.3 사건' 당시 학살지가 4,300군데가 된다고 했는데, 그해 2월 하루 한 곳을 다니며 약 10여 곳을 둘러봤다. 당시 이정표나 표시가 없었다. 돌아다니며, 자연물을 이용해 여기가 '4.3 사건' 장소라는 이정표를 만들었다.
 
조사하면서 '4.3 사건' 여성 희생자에 대한 작품이 없었고, 잘 표현을 안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이유로 생존하신 피해자분들도 계시는데, 모진 성고문, 성희롱을 말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겪으며 살아간 분들에 대한 존중이 필요해서 공론화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인터뷰로 들쑤시는 것이 아니라, 말로 하지 못한 가슴에 쌓인 한을 몸을 통해 움직이며 녹아내리게 하는 춤의 양식이 필요했다. 
 
'제주 : 년의 춤'의 클라이맥스는 유가족 등 120명이 모여서 춤을 추는 것이다. 실제로 몸을 움직이면서 쌓여있던 한을 풀어내니, 말로 하는 것보다 강력한 에너지가 나온다. 내가 바라는 방식이 그런 것이다. 춤이 끝난 후, 서로 안아줬다. 처음엔 무거웠지만, 나중엔 밝았다. 감독으로 이 형식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현재까지 최근 만든 작품이 모두 개봉되지 않았다. 이 프로젝트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ㄴ 열 작품을 준비하면서, 이제 세 작품을 만들었다. 개봉한다면 제작비를 충당할 수 있겠지만, 전혀 그러지 못하니 빚이 쌓여 있다. '제주 : 년의 춤'은 배급 계약을 기다리고 있다. '햇살댄스프로젝트' 기획을 한 이유는 2006년 제주도에서 이정표 작업을 하면서 마지막 장소가 남제주에 있는 섯알오름이었다. 보도연맹원들이 한꺼번에 학살당한 곳이다.
 
   
▲ '제주 : 년의 춤' ⓒ 사유진 감독
 
이곳에서 36살 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발견했다. 1950년 7월 6일,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당하셨다. 제주도에서 이정표를 세울 때, 우리 외할아버지는 여기서도 돌아가셨고, 인식이 확장되어 남경대학살, 유대인 대학살 때도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때 결심을 하게 됐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는데, 양화가 악화를 멈추게 하고 싶어서 진행하게 됐다. 그래서 지원을 받지 못하더라도 크라우드 펀딩을 하려 하는데, 최근 3만원, 1만원, 500만원 등 다양한 금액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독립영화의 개봉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ㄴ '동주'를 봤는데, 영화가 정말 좋았다. '동주' 제작자는 독립영화를 만드는 신연식 감독이다. 인터뷰를 읽다가 "영화가 앞으로는 상업영화, 독립영화가 아니라 상업영화, 저예산 영화로 나뉠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독립영화는 돈이 되지 않으니, 독립영화가 더 설 자리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으론 암울하면서도, 아직 머리가 띵한데, 나는 어디에 서야 하나 싶었다.
 
신연식 감독은 "'동주'같은 영화를 앞으로 열 작품 만들겠다"고 하셨다. '동주'가 5억 정도 들어갔다고 했다. 영화는 산업적인 측면에서 벗어나지 않다는 인식을 하지만, 독립영화로 보면 출구가 다양한 영화, 예술영화를 더 확장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관객의 선택에서 대자본이 들어간 커다란 영화만 볼 필요가 없게 된다. 스크린쿼터를 외화 상영 비율이 아니라 차라리 국내 다양성영화에 늘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것도 끝내는 옳은 방법이 아니다. 제도화된 모든 것이 별로 좋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사실 2,500개 상영관 중 2,300개 정도를 한 영화가 가져가는 것은 막아야 하는 내용은 5~6년 전부터 나온 것인데, 실효성은 거의 없다. 김기덕 감독님도 그런 이야기에 대해 지적을 했고, 자본의  흐름 속에서 임권택 감독님의 작품도 안타깝게 되고 있다. 영화 퀄리티는 둘째로 하더라도, 국가적 예우로 제작비를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달빛 길어올리기'(2010년)를 보면, 제작비 지원이 부족해서,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거 봐, 102편 영화를 만들면 뭐해. 퀄리티가 떨어지는데"라는 반응도 그래서 나왔다. 
 
최근 독립영화 개봉에 걸림돌로 지적되는 것이 '재개봉 열풍'이라는 지적도 있다.
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매해 영화 연감을 만드는데, 지난해 한국영화는 230편 정도가 개봉했다. 그게 진짜 만들어져서 개봉을 하나 했더니, IPTV까지 포함된 것이다. IPTV에서 주종을 이루는 것은 성인에로물인데, 이것까지 개봉작품으로 포함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따끈따끈하게 영화 개봉하는 것을 보면 그 수는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상업영화도 지금 개봉하기 힘든데, 우리 같은 독립영화는 더욱 개봉하기 힘들다. "너희는 극장 잡지 말고, IPTV에서 바로 개봉하라"는 무언의 압력처럼 들린다. 그러고 보면 요즘은 상업영화도 극장에서 내려가자마자 IPTV에서 볼 수 있다. 배급문제, 개봉문제가 결국 관객과 만나는 문제인데 쉽지가 않다. 이 이야기가 쉽지 않은데, 신자유주의로 인해 정부가 하는 역할은 기업이 한다. 대기업에선 이윤추구만 있고, 돈이 될 만한 상업적인 요소의 영화만 만드는 게 지금 문제다.
 
질문으로 돌아가면, 제도적이면 속에 문화의식이 높아져야 모든 것이 가능할 것 같다.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데, 외국에선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감독의 영화가 상설로 상영되는 것이 시사해주는 바가 있다. 극장주의 마인드도 있겠지만, 끊임없이 관객이 요구하니 맞춰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재개봉은 좋다고 생각한다.
 
   
▲ ⓒ 사유진 감독
 
앞으로 계획은?
ㄴ 지금 준비하는 것은 베트남의 인민 학살 영화다. '시네-댄스'가 실험적 요소가 강하다. 이것을 좀 더 완성 있고 밀도감 있는 형식으로 찾는 중이다. 베트남 민간 설화와 춤을 접목한 것으로 영화를 만들 것 같다. 제작 단계 중에 나오는 위험성에 대해선 어느 정도 내성이 있어서 두렵진 않다. 다만 제작비 확보가 문제다. 베트남 사람들을 위해 만든다고 할 때, 얼마나 베트남 사람들을 잘 표현할까에 대한 미학적인 문제의 고민이 있다. 압력, 외압 등의 별걱정은 없다.
 
문화뉴스 양미르 기자 mir@mhn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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