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킥'서 '야동순재' 별명…'꽃할배'로 대중에게 다가서
말년에 연극 드라마 '개소리’, 건강악화에도 연기대상까지

현역 '최고령 배우'로 활동해온 배우 이순재가 별세했다. 향년 91세. 유족에 따르면 이순재는 2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이순재는 최근까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2TV 드라마 '개소리' 등에 출연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사진은 '2007년 MBC 방송연예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탤런트 이순재. 연합뉴스 자료사진
현역 '최고령 배우'로 활동해온 배우 이순재가 별세했다. 향년 91세. 유족에 따르면 이순재는 25일 새벽 세상을 떠났다. 이순재는 최근까지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2TV 드라마 '개소리' 등에 출연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사진은 '2007년 MBC 방송연예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한 탤런트 이순재. 연합뉴스 자료사진

(문화뉴스 이기철 기자) 91세를 일기로 별세한 이순재(1934~2025)는 한평생 장르를 도전하고 소화한 '천생 배우'였다. 연극·드라마·영화 등의 매체를 가리지 않고 소화한 69년 배우생활을 마감했다.

소속사 에스지웨이엔터테인먼트는 이순재가 25일 새벽 별세했다고 공지했다. 빈소과 장례 절차는 논의 중이다.

정통 사극 드라마부터 시트콤, 영화, 연극 등 폭넓은 영역에서 활동한 그는 눈을 감기 직전까지도 장르를 가리지 않는 연기 열정으로 후배 배우들에게 귀감이 됐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네 살 때부터 서울에서 산 고인은 한국전쟁으로 가족과 함께 피란길에 올라 대전에 정착했다. 호적상으로론 1935년생이다. 대전고등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올리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다니던 1956년 신영균, 이낙훈, 황은진 등 동기들과 함께 연극반을 재건하는 등 일찍이 연기에 관심이 깊었다.

고인은 같은 해 유진 오닐의 연극 '지평선 너머'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다. 이듬해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대한방송의 드라마 '푸른지평선'으로 브라운관에서 얼굴을 알렸다. 1961년 KBS 개국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통해 본격적으로 방송계에 진출했다.

데뷔 초기 TBC 전속 배우로서 100편이 넘는 드라마에 등장했고, 1966년 영화 ‘초연’으로 스크린에 나선다. 1980년대까지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으나 주연급보다는 주로 조연으로 활약했다.

사진은 2006년 MBC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제작발표회에서 극중 아버지 역을 맡은 탤런트 이순재. 연합뉴스 자료사진
사진은 2006년 MBC 일일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제작발표회에서 극중 아버지 역을 맡은 탤런트 이순재.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다 57세이던 1991년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가부장적인 인쇄소 사장 이병호 역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작품은 평균 시청률이 역대 1위에 해당하는 59.6%를 기록했고, '대발이 아버지'로 불리던 이순재는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고인은 정치 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드라마 '야망', '작별', '목욕탕집 남자들' 등에 잇따라 출연하며 연기 활동도 놓지 않았다.

1996년 정계를 은퇴한 뒤 다양한 작품에 출연한 고인은 1999년 MBC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의 스승 유의태를 연기해 다시 한번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제자들에게는 엄하지만, 병자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의학에 대한 신념이 강한 명의로 묘사되는 인물이다. 이후 '상도', '장희빈', '불멸의 이순신', '이산' 등 사극을 비롯해 '흥부네 박터졌네' 등 현대극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작품에서 주·조연으로 넘나들었다.

그는 2006년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간 보여준 딱딱하고 엄한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괴팍하지만, 권위는 없는 한의원 원장을 연기했다. 친척들 앞에서 야한 동영상을 보는 모습이 들키는 에피소드로 '야동 순재'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했다. 덕분에 주 시청자층인 젊은 세대에게도 친숙한 이미지를 쌓을 수 있었다.

고인은 72세에 찍은 이 작품으로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거침없이 하이킥'이 일주일에 다섯 번 방영되는 탓에 강도 높은 촬영 일정을 견뎌야 했지만, 한 방송에서 "투병 중인 환자들이 '하이킥'을 볼 때 유일하게 웃는다는 얘기를 들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취지의 말을 하기도 했다.

이후 2008년에는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치매에 걸린 오보에 연주자 역을 소화해 시청자들을 눈물짓게 했다. 2011년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도 까칠하지만, 사랑하는 이에게만은 따스한 노인 역으로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속편 '지붕뚫고 하이킥'(2008)에서는 또다시 코믹한 이미지를 보여줬다. 고(故) 김자옥과 노년의 로맨스를 연기하고 사위인 정보석과 티격태격하는 모습으로 큰 웃음을 안겼다.

2013년에는 tvN의 여행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 신구, 박근형, 백일섭과 함께 출연하며 예능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사진은 2003년 연극 '리어왕: KING LEAR' 연습실 공개 및 간담회에서 주요 장면 시연하는 배우 이순재. 연합뉴스 자료사진]
사진은 2003년 연극 '리어왕: KING LEAR' 연습실 공개 및 간담회에서 주요 장면 시연하는 배우 이순재. 연합뉴스 자료사진]

80세가 코앞인 나이에도 비행기에서 잠을 청하지 않고 공부하거나,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불평 없이 촬영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줘 젊은 시청자에게 '참 어른'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후 2014년, 2015년, 2018년까지 '꽃할배'의 맏형으로 팀을 끌어갔다.

말년의 그는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활약했지만, 특히 연극 무대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고인은 젊은 시절에도 연극에 대한 애정을 보이며 꾸준히 무대에 섰다. 그러나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몇 시간 동안 라이브로 연기해야 하는 부담을 감수하고 연극을 계속했다.

특히 87세이던 2021년 '리어왕'에서는 백발을 풀어헤치고 맨발로 200분 동안 방대한 대사를 완벽 소화해 관객의 극찬을 끌어냈다. 69년 연기인생에서 출연한 작품은 모두 425편에 이른다.

고인은 지난해에도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무대에 섰으나 건강 이상으로 일부 공연 회차를 취소했다. 당시 "건강한 모습으로 반드시 다시 무대에 올라 보답할 수 있도록 회복에 집중하겠다"고 다짐했으나, 3개월간의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사 진단에 따라 남은 일정에서 하차해 대중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

고인은 지난 1월 11일 드라마 ‘개소리(2004)’로 KBS 연기대상에서 역대 최고령 연기대상을 받으며 현역의 면모를 과시했다. 당시 이전보다 다소 야윈 모습으로 무대에 오른 고인은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라고 감격한 모습을 보였다.

당시 ‘끝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고인은 “열심히 한 배우로 기억해주시면 좋겠다”며 연극 ‘리어왕’의 한 장면을 연기했다. "격려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 정말 평생동안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다, 감사하다."라고 밝힌 당시 수상 소감이 고인의 마지막 공개 인사가 됐다.

25일 별세한 이순재. 연합뉴스
25일 별세한 이순재. 연합뉴스

문화뉴스 / 이기철 기자 thecenpen@gmail.com

저작권자 © 문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